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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유조이 Sep 15. 2023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며 삽니다

노화는 죽음에 이르는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30대 젊은 날, 인체의 신비전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편안하게 관람하는 다른 사람과 달리 저는 서둘러 뛰쳐나왔습니다. 고민하는 인간의 뇌나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은 그나마 참을 만했습니다. 그러다 한 노파의 알몸 전시를 보고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었습니다. 축 쳐져서 배를 덮고 있는 젖가슴, 쭈글쭈글한 생식기 주변으로 흘러내린 피부 조직, 오다리로 벌어져 항아리 같은 몸을 가진 노파는 서서 잠을 자는 듯 보였습니다. 어릴 적 아플 때 내 머리를 걱정스레 짚어주던 다정한 할머니가 거기 박제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당한 것 같아 분노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시사점이 다르겠지만 인간이 저토록 스스로를 대상화시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나도 세월 따라 점점 저렇게  쪼그라들고 결국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중세시대 그림에는 해골이 자주 나타납니다. 바니타스 회화라고 하지요. 바니타스는 헛됨, 공허함을 뜻하는 라틴어 명사입니다. 바니타스화에는 풍성하게 흐드러진 꽃화병 옆이나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머리 위 혹은 보석과 악기 사이 그리고 책 위에 해골이 그려져 있습니다.


  오래전 런던에 갔을 때 내셔널 갤러리에서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그림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각종 책, 과학 도구 등이 가득한 선반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나란히 서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딛고 있는 카펫 바닥에는 사선처럼 휘어진 흰색 해골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사진처럼 정교하게 묘사된 인물과 정물에 비해 해골은 잘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도록 그려져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고 발밑의 죽음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죽음을 밟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삶이란 우리가 원치 않을 때 갑자기 닫힐 수도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날들 외면하거나 잊고 살아갑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느 학자는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죽는다"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날 하루는 조금이라도 덜 째째하게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항상 깨어있기 위해 아침마다 죽음을 되뇌는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확실히 죽음을 생각하면 내가 가진  문제가 사소해 보이고 한 줌 햇살이 소중해 보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아등바등하지 않게 됩니다. 
 

   '메멘토 모리' 이제 마지막을 상상하며 삽니다. 어릴 적 읽은 동화의 끝은 항상 "늙어서 죽을 때까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입니다. 늙어서 죽는다는 것은 분명 해피엔딩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우리 서로가 얼마나 징그러울까요. 우리 모두는 사라질 존재이기 때문에 애틋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시간을 들여 늙어가게 합니다. 노화는 죽음에 이르는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 봅니다. 젊은 시절에 본 인체의 신비전의 노파처럼 노화에 따른 죽음이면 좋겠습니다.


'아침 10시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차고 열어둔 창문사이로 봄바람이 불어와 시폰 커튼이 살랑거리는 날입니다. 깨끗하게 손질된 하얀  리넨 침대 곁을 지키고 있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보다 훨씬 작아진 모습으로 내가 누워있습니다.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친구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행복한 마지막도 마지막은 마지막이기에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애틋하고 소중해집니다. 나에게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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