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셈이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얼마 전 백화점에서 기내용 여행가방을 구입했습니다. 사용하던 가방이 낡아서 새로 사야지 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벤트홀에서 기획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살까 말까 고민하는데 내일이면 가격이 인상될 것이라는 직원의 말에 냉큼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집에 와서 모델명을 검색해 보니 3만 원이나 가격차이가 났습니다. 109,000원에 구입했는데 79,000원에 무료배송이라니요!
젊은 시절 사야 할 물건이 있으면 백화점부터 둘러본 뒤 같은 모델을 인터넷 최저가로 구입했습니다. 심하게는 2배까지 가격 차이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나 싶어 신기해했습니다. 백화점 가격대로 물건 사는 일은 어리석다 생각했습니다.
'멍청비용'이라고 하지요. 해지시기 놓쳐버린 정기구독권이나 항공권 변경수수료처럼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쓰지 않았을 비용을 가리키는 신조어입니다. 같은 물건을 백화점에서 비싸게 사는 것도 포함되겠지요.
많든 적든 손해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고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니 예전 같았으면 3만 원이 아까워 반품하고 인터넷으로 다시 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3만 원에는 내가 물건을 직접 보고 선택한 비용과 직원의 서비스와 노동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백화점으로 들고 가 반품하고 카드 취소하고 다시 주문하는 일들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떤 돈은 멍청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를 위해 지불해야 합니다. 스마트폰 월정액을 가입 시기에 따라 조절하고, 인터넷 통신사도 2~ 3년마다 바꿔서 사은품도 챙기고, 연회비만 축내는 자주 쓰지 않는 카드도 없애고 이러고 살면 좋겠지요.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쉽고 간단한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예상외로 많은 에너지와 주의를 요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손해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적은 돈이 흘러나가도록 두는 것보다 더 손해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돈은 뻔히 알면서도 흘러 나가게 내버려 둡니다. 어쩌다 한번 읽는 e북의 정기결제를 내버려 두고 몇 개 쓰지도 않는 카카오 이모티콘 월정액을 지켜봅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면 멍청비용이겠지만 알고도 버려두는 것은 여유비용입니다.
여유비용을 지불하고 얻는 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작은 손해에 연연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비 오는 날, 집에 굴러다니는 우산을 두고 편의점에서 우산을 구입할 때 스스로 책망하지 않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셈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긴장하지 않는 쪽을 택합니다. 조금 허술해서 오히려 여유 있다 생각합니다. 그러다 에너지 넘치는 어느 날 여유비용을 청산해 나가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 날이 오기까지 마음 편히 여유비용을 누려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