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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w nina Oct 19. 2024

자의식의 옷을 벗어던질 것

나의 관객이 되어줄 사람은 없으며 모두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늦은 여름 일요일 한 낮, 대학가 골목 안을 어슬렁거리다가 나를 기다린 것 같은 원피스를 만났다. 고흐의 ‘아몬드 나무’를 연상시키는 푸른빛인데, 가까이 보니 화려하고 자잘한 꽃들이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블루 톤을 이루고 있었다.

인어 라인으로 몸매를 따라 흐르다가 종아리 부분에서 굵은 웨이브를 그리며 셔링이 잡혀있었다. 쇼핑할 계획은 없었지만 바로 마네킹이 입은 옷을 벗겨내었다. 그런데 원피스의 앞모습은 무난한 라운드 네크라인이었는데 뒷모습이 반전이다. 등이 커다란 U자를 그리며 브래지어 끈 바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있었다.




다른 옷을 안에 겹쳐 입자니 스타일이 살지 않고 그냥 입자니 용기가 필요했다. 내 돈 주고 산 옷, 묵혀둘 수 없어 입고 나섰다. 천정 높은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슬쩍 받아넘기는 나 자신의 대범함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잠시, 거리로 나서자 등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횡단보도 앞에 멈추자 무방비로 드러난 등에 사람들의 시선이 와서 꽂혔다. 등이 따끔거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비틀어 뒤를 돌아보았다. 쨍쨍한 햇빛 아래 아무도 없었다. 더위를 피해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 관심도 없었다. 나 혼자 뭘 한 거지? 등이 무안해서 발개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안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8차선에 멈춰 선 차들이 에어컨 빵빵한 실내에 앉아 나의 이런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번에 런웨이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무릎을 쭉 뻗어 여름 열기로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길고 긴 아스팔트를 건넜다. 자의식의 강을 건넜다.


‘나쁜 사마리아인’(장하준)에 보면 핀란드 사람과 코끼리에 관한 얘기가 있다.

각 나라 사람들에게 코끼리에 관한 책을 쓰라고 하면, 꼼꼼한 독일 사람들은 〈코끼리에 관해 알려진 모든 것〉이라는 학술서를, 존재론적 고민을 하는 프랑스 사람들은 〈코끼리의 삶과 철학〉이라는 철학서를, 실용적인 미국 사람들은 〈코끼리로 돈 버는 방법〉을 쓴다고 한다. 그리고 핀란드 사람들은 〈코끼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책을 쓴다는 것이다. 자의식에 관한 한 나는 핀란드 사람과 견주어도 될 것 같았다.


자의식의 사전적 정의는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나 자신의 행동, 성격에 대하여 깨닫는 일’이다. 자신이 처한 위치는 주변 상황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핀란드는 오랜 세월 스웨덴과 러시아의 식민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다. 우리의 과거사와 비슷하다. 외세로부터 자신들의 고유성을 지키려는 정체성에 집착할수록 집단 자의식은 커진다. 함께 지켜야 할 무엇이 있을 때 뭉치게 되고 무리에서 튀는 행동은 지양받는다. 핀란드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이유이다.  


  등 파진 원피스를 입고 횡단보도가 런웨이처럼 여겨지던 그날, 이런 내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한없이 자유롭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나는 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무대 위 배우가 아니고 사람들은 관객이 아닌데 나는 왜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고 생각했을까?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는 이면에는 지나친 주인공 의식이 숨어있었다. 


주인공 의식은 다른 사람이 나만 볼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스스로 만든 허상의 무대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며 타인을 관객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아무도 관객이 되어줄 사람은 없다. 모두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사느라 바쁘다. 


주인공은 자신은 남과 다르고 은연중에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특별한 것이 맞지만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특별하다. 타인의 특별함은 나의 특별함과 다를 뿐, 각자 특별하다는 점에서 같다. 그래서 나의 특별함은 평범함이 된다.





사람들은 나를 쳐다볼 수 있다.

그러나 그뿐, 사람들은 나무 보듯, 카페 간판을 보듯 그렇게 보고 지나갈 뿐이다. 세상의 관대함은 무관심함의 뒷면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시선에 의미를 두거나 꼽씹을 필요 없다.

자의식의 옷을 벗어던질 때 자유의 옷을 입을 수 있다.



+ 나를 옥죄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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