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스콧 슈만은 세계 최고의 스트리트 패션 블로그를 운영한다.
그는 2005년 뉴욕에서 시작해 파리, 스톡홀름, 밀라노 등 다양한 도시를 돌아다니며 거리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입은 사람들을 찍었고, 그의 사진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몇 년 후 블로그의 사진을 추려 ‘사토리얼리스트’라는 책을 발행했다.
사토리얼리스트(sartorialist)는 ‘재단사’를 뜻하는 라틴어 ‘사토르(sartor)에서 파생된 말인데 자신의 개성을 고유한 스타일로 표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책 발행 당시 표지 모델이 누가 될지 될지 모두가 궁금해했다.
햇빛 아래 웃고 있는 밀라노의 늙은 이발사, 모자를 삐딱하게 눌러쓴 청교도인, 고급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배 나온 신사, 금발 파마머리를 휘날리는 중년 여성, 모두가 매력적이었고 자신만의 멋을 풍기고 있어서 표지모델로 손색이 없었다.
표지 모델은 파란 코듀로이 와이드팬츠에 카키색 가죽 재킷을 입고 빨간 비니를 쓴 ‘줄리’라는 젊은 여성이다. 오른손에는 큰 가방을 들고 왼손은 주머니에 찌른 채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무심한 듯 카메라를 바라본다.
나는 앞표지에 실린 글을 읽었다.
‘줄리는 다리 길이가 달라서 걸을 때 조금 절뚝거린다.’
화려한 옷이 어울렸던 엄마의 사진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포즈이다.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항상 비스듬히 옆으로 서있다. 조금이라도 날씬하게 보이려는 노력의 결과 정면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엄마는 몸집이 컸고 멋쟁이였다. 함께 쇼핑을 하면 본인에게 어울리는 옷을 잘 찾아내셨다. 선명한 연두색 재킷, 분홍 실크 블라우스, 화려한 원색의 바지 등 취향이 확실해서 옷을 보면 바로 엄마 옷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구입으로 이어지는 옷은 드물었다. 색깔이나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사이즈가 작았고, 어쩌다 사이즈가 맞는 옷은 엄마 취향이 아니었다.
딱 한번 엄마가 다이어트를 한 적이 있다. 다이어트 약을 먹고 식사량을 줄이고 운동을 하다가 어느 날 그만두셨다. 왜 계속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누구나 자신에게 적당한 몸무게가 있는 것 같다. 살이 빠지니 힘도 없고, 살이 좀 찌더라도 먹고 싶은 것 먹고사는 것이 좋다”라고 하셨다.
나는 한 번도 엄마가 날씬했더라면 더 예뻤을텐데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예뻤다. 분홍색 재킷도 연둣빛 투피스도 살을 빼서 입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은 바로 입으셨다. 몸집 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덕분에 나는 추구해야 할 멋진 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우리는 가끔 입고 싶은 옷이 있어도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고 말하며 자신의 몸을 원망한다. 지금의 내 모습을 나라고 인정해 버리기엔 뭔가 부족하고 아쉽다. 그래서 지금의 나보다 노력하면 얻어질지도 모르는 가상의 나에게 가치를 두고 거기서 넘치는 것은 군살이라 칭하고 구박한다.
평생 다이어트를 통한 얻으려고 하는 것은 날씬한 몸이다. 건강을 위해 식이조절을 하고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은 바람직하지만, 스스로에게 엄격하다 못해 자신을 구박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살이 쪄서 가장 나쁜 일은 스스로 뚱뚱하다고 말하고 움츠려드는 것이다.
스콧 슈만은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줄리’를 통해 말한다.
아름다움은 신체적 조건이 아니라 자신을 존중하는 내면의 건강함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녀가 수많은 사진들 중에 표지로 뽑혔는지 이해된다.
아름다움의 기준을 외부에 두면 나는 언제나 수선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자신을 중심으로 정의해 나가면, 한쪽 다리가 다른 쪽 보다 길거나, 뚱뚱해서 맞는 옷을 쉽게 살 수 없더라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
버려야 할 것은 군살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난하는 마음이고, 존중받아야 할 것은 옷이 아니라 내 몸이다.
아름다움의 출발점은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 어떤 모습이어도 언제나 나는 내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