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기꺼이 닦이고 지워지고 받아들여지지 않고 하찮아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결코 정말로 변하지는 못할 것이다. - D. H. 로렌스-
오십이 넘었다고 갑자기 우아해지거나 친절해지지 않는다.
주말 부부로 사는 탓에 집에 뭔가 이상을 발견할 때는 거의 토요일이다. 두 달 전 현관 등 센서가 들어오지 않아 관리소에 전화를 했더니 토요일이라서 봐줄 수 없다고 한다. 이상이 있으면 주중에 전화하라고 했다. 주중 근무시간에 우리 집에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직장으로 학교로 바쁜 남편과 아이였고 집에 어느 한쪽에 이상이 생기면 이상이 없는 다른 쪽에서 생활하며 불편함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라 맡길 수가 없다. 그럼 토요일은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주 급한 일만 봐주고 있다고 했다.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안방 불이 켜지지 않았다. 거실과 다른 방은 괜찮은데 안방 스위치만 말을 안 듣는다. 하필 토요일이다. 관리실에 전화해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가 어둡게 주말을 지낼 수 없어 전화기를 들었다. 컬컬한 음성은 처음 듣는 직원 목소리이다. 역시나 급한 일 아니면 토요일은 봐줄 수가 없다고 한다. 나는 안방에 전등이 켜지지 않은 것은 급한 일이라고, 관리사무소에 전화하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도대체 그럼 토요일은 왜 근무를 하시는 거냐고 따지기 시작하자 남편이 전화를 가로챈다. 급한 일 있으시면 끝내시고 나중에라도 꼭 와서 봐달라고 부탁을 하고 전화를 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리고 불만 가득한 표정의 직원이 나타났다.
현관을 들어 서자 마자 나를 보더니 “사모님” 하고 부르는데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놀랄 겨를도 없이 성큼 신발을 벗고 위협적으로 내 쪽으로 다가온다. 작은 키에 다부져 보이는 인상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포스를 가진 남자이다.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다.
말보다 신체적 다가옴이 더 저돌적이고 불쾌하다.
본능적으로 “ 왜요? 사모님 왜요?” 하고 맞받아치는데 나도 파이팅이 저절로 실린다. 전등을 고치려 온 것이 아니라 자기 기분이 상해서 그것을 풀려고 온 것이다. 폭력적인 분위기로 위협해 오는 것에 강한 거부감과 함께 분기가 탱천 한다. 이것은 관리소 직원과 입주민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싸움이다. 본인 입으로 여기서 일한 지 3일 되었는데 일 관두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맞짱 뜨자는 말이다.
'오호, 나도 질 수 없지.'
‘네가 깡패든 뭐든 어디 와서 행패야’ 물론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싸움은 초반 기세가 중요하다. 남자가 뭐라고 하기 전에 내가 느낀 신체적 위협만큼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이번엔 남자가 욕을 한다. 양반 역할을 하던 남편이 욕에 대해 따지니 '갑'(결코 을도 아니면서)이 아닌 자신에 대해 스스로 욕을 한 것이라고 둘러대며 바쁘게 성질을 부린다. 그 와중에 주머니에 꽂혀있던 드라이버를 손에 들고 휘두르며 얘기하는데 마치 흉기를 휘두르는 것 같이 신경이 쓰인다. 그런 효과를 노리고 즐기고 있는 몸짓이다. 무슨 안 좋은 일이 벌어질까 마음으로는 바싹 긴장했지만 겉으로 표 내고 싶지는 않다. 드라이버 내려놓고 말씀하시라고 대차게 대들자 기사가 드라이버 들고 다니지 식칼 들고 다니겠냐고 하는데 기가 질린다.
그 사이 흥분이 가라앉은 나는 남자에게 사과할 마음 있으면 언제든지 사과하라고 기다리겠다고 하니 남자는 택도 없다는 표정으로 사라진다. 물론 전등은 자신은 모르겠다고 고치지도 않고 갔다. 이런 남자는 웬만하면 패스하는 것이 좋았겠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맞다. 센 언니 캐릭터다.
나는 모르겠는데 주변에서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안다. 싸움을 걸어오면 피하지 않는다. 부당한 일은 참지 않는다. 상대가 위압적이고 위협이 강할수록 더 강하게 반응하다. 20여 년 전 만 해도 직장 내 명절 선물이라는 것이 있었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는 지위와 관계없이 선물을 주고받기도 했다.
명절이 지난 어느 날, 양말을 교실마다 나눠주는 것이다. 그런데 내 교실은 들어왔다가 그냥 나갔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명절에 자기에게 선물한 사람에게 교감이 답례로 주는 양말이란다. 나는 선물을 안 했으니 양말 받을 자격이 없었다. 양말을 안 받은 사람은 학교에서 나 한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위선적인 교감의 행태가 거슬렸는데 선물까지 해가며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모두 뒤에서 교감을 욕하고 싫어했지만 선물을 안 해서 찍히기는 싫었나 보다. 교감은 선물의 크기가 존경의 크기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직속 상사이니 내가 입은 피해는 컸다. 교실에 때 없이 나타나 현장장학을 한답시고 지적질을 하고 교묘한 말로 전체회의에서 나를 깎아내렸다. 교감의 비열함이 드러날수록 마음의 동요 없이 그를 무시할 수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한편 내가 사람 제대로 봤다는 확신에 따른 만족감이 있었다.
부당한 일은 대부분 나보다 지위가 높거나 권력이 센 상대로부터 온다. 만만한 상대에게만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대든다는 것이 그나마 내 성격의 미덕이라면 미덕이겠다. 이익을 따져 화를 내거나 참지는 않는다. 실리보다 명분이 앞서는 성격 탓이다.
이런 성격의 내가 모욕을 참아보기로 한 것은 우아해지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관리실 남자와의 싸움 이후 지금의 나를 넘어서서 좀 더 나은 나로 살 수 있는지 가늠해보고 싶어 졌다. 게다가 금강경을 공부하는 남편이 모욕과 멸시를 참으면 지난 업장이 모두 소멸된다 하니 귀가 솔깃해졌다.
그동안 쏟아낸 화들을 다 없앨 수 있다니 이런 좋은 일이!
모욕은 깔보고 욕되게 하는 것이고 멸시는 업신여기거나 하찮게 여겨 깔보는 것이다.
굳이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모욕이 어떤 것인지 느낌 아니까 일단 ‘모욕 참아보기’를 버킷리스트에 올렸다. 모욕을 참는다는 것은 어지간한 화남은 다 참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싸서 눈팅만 하는 백화점 브랜드 옷집에 들어가 옷을 보고 있었다. 사지는 않고 옷을 뒤적거리고 있으니 직원이 다가와 내가 만진 옷을 바로 다시 만져서 거는 시늉을 한다. 안 살 거라면 나가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이다. 예전 같으면 바로 기분이 나빴을 텐데 모욕 참기를 이루려다 보니 이번 일은 모욕 점수가 얼마가 될까 먼저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코로나로 불경기다 보니 신경이 곤두섰구나 이해심이 생겨난다. 웃으며 인사하고 나오게 된다. 타인에게 하찮은 취급을 받아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는 분명히 우아하다.
자기가 옆에 없을 때는 성질 좀 참으라는 남편의 당부도 들어줄 겸, ‘모욕 참아보기’를 실천하는 동안 본의 아니게 너그러운 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 어쩌면 나이 든 사람의 우아함은 너그러움에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모욕 참아보기'버킷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