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지가 아니라는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번 설은 5인 이상 집합 금지라는 국시를 받들어, 언니 가족이 다녀가고 난 후 아버지 집을 찾았다.
엄마 돌아가시고 혼자되신 지 10년이 넘어 아버지도 이제 팔십 노인이다. 나이를 세어보면 아버지가 늙었다는 것을 아는데도 이상하게 우리 아버지는 ‘늙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국제 정세에서부터 미스 트롯 가수에 이러기까지 어떤 화제에도 막힘이 없고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시는 분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거슬러 생각해 보면 지금 이렇게 아버지와 한 상에서 밥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딸만 여럿 낳은 우리 할머니에게 아버지는 귀하디 귀한 3대 독자였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누나 하나에 여동생만 넷 거느린 아버지는 실제적인 가장이자 집안에 법이었다. 좋은 머리를 가진 아버지가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못해주었다는 할머니의 자책은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에게 쩔쩔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가까운 친척들까지 아버지를 종손으로 떠받드는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다 보니 나에게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고 내가 넘지 못 할 큰 산처럼 보였다. 아버지에 대한 내 흠모의 감정은 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과시하는 언니에 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작은 철공소부터 시작해 큰 공장으로 키워나가며 먹고살기 바빴던 아버지는 그 시절의 아버지들이 그랬듯이 자식에게 내어줄 시간은 없었다.
학교를 그만두던지 신문사를 그만두던지
그런 아버지가 내 인생에 한 번의 결정적인 개입을 하게 되는데 그 일은 두 번에 걸쳐 나타난다.
첫 번째는 학력고사를 치고 난 다음이다. 서울에 있는 신문방송학과를 갈 수 있는 집안 형편이 아니어서 부산에 국문과를 가려고 하자 처음으로 아버지가 내 인생에 관심을 가지고 관여를 하셨다. 국문과 나오면 놈팽이 밖에 할 게 없다고 선생이 돼라 하셨다. 아버지의 한마디로 중학교 때부터 선생은 하기 싫다고 심지어 선생 옆집에도 살기 싫다고 하던 내가 사범대에 가게 된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좋아하는 지라 유아교육학과는 나름 차선책은 되어주었다.
결정적인 두 번째는 대학 2학년 때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대학신문사 기자를 했다. 기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학과보다 학교 기자 생활에 더 큰 의미를 두고 대학을 다녔다. 데모가 한창이던 1987년, 최루탄 냄새와 막걸리 냄새가 범벅이 되어 그날도 자정을 넘겨 집으로 돌아갔다. 광안리 주택가 오르막 끝에 있는 낡은 연립주택을 향해 비실비실 걸어가던 내 눈에 멀리 사람 실루엣이 보였다. 깜깜한 밤, 딸의 늦은 귀가를 걱정하여 아버지가 마중 나오신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오르막을 단숨에 뛰어올라 아버지에게 다가섰다.
거의 동시였다. “아버지”하고 감동에 차 부르는 내 입에서 술 냄새가 끼친 것과 아버지가 두툼한 손바닥을 들어 내 빰을 때린 것은.
“내일 당장 학교를 그만두던지, 신문사를 그만두던지 해라”
나는 충격과 절망에 쌓인 그 어두운 밤을 기억한다. 내가 아는 한 처음 맞은 날이다. 아버지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문사를 그만둬야 했을 때 내 청춘은 끝났다.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이유가 없어 보였다. 햇빛이 내리쬐던 초여름, 육교에 좌판을 벌이고 앉은 할아버지에게 2000원 주고 아버지 도장을 팠고 그것으로 가족들 모르게 휴학계를 제출했다.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기는 얼마나 쉬운 일인가?
다시 복학하고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가 되어 30년을 살아오면서 마음 밑자락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없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늘 아버지에게 빚진 기분을 갖도록 강요해왔다. 아버지가 늙은 할머니에게 그 옛날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했다고 원망하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다 큰 어른이 힘없이 늙은 엄마를 원망하는 것이 말도 안되게 파렴치해 보였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때의 아버지처럼 늙은 부모를 원망하고 있단 말인가?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의 범인들은 어릴 적 지독한 부모 밑에서 고생한 경험들이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에 부모라는 장막은 늘 개인의 책임을 어느 정도는 가려주었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라도 우리 사회는 부모에게 많은 부분 책임을 지우는 분위기이다.
수저론이 그렇다.
‘흙수저’라는 말에는 기본적으로 부모에 대한 원망이 깔려있다. 자신의 사회적 계급을 재단하기 전에 부모에 대한 평가를 내려놓고 있다. 자식이 부모를 원망하기는 얼마나 쉬운 일인가? 세상에서 제일 만만하게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존재가 부모이다. 부모가 자식의 인생에 큰 줄기를 지워준다는 점에서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부모의 책임만이 아니라 그 부모의 부모 책임이기도 하고 그 윗대의 책임이기도 하다. 책임을 나 아닌 밖에서 묻자면 그렇게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것은 운명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부모도 인생을 잘 살고 싶었던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다.
나는 그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산다는 핑계 뒤에 숨어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해 잊어버리고 열망하기를 멈추고 살아왔다. 내 염원이 간절했으면 진작에 글쓰기를 배우고 공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이제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은 완전하게 나에게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비로소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보인다. 신문팔이를 해 가며 어린 여동생과 엄마를 부양해야 했던 꿈 많고 총명했던 소년이,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울분을 토하는 야망에 찬 젊은이가, 여기저기 병든 몸을 받아들이고 노쇠해가는 늙은이가 보인다. 내 아버지도 부모이기 이전에 자기 인생을 잘 살아보고자 했던 결함 많고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었다.
아버지를 유독 좋아하는 언니와 달리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불편하다. 길어야 하루 정도 같이 있으면 슬쩍 헤어질 시간이 기다려진다. 손을 잡아드린다든지 안아드린다든지 할라치면 몸을 빼고 싶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버지도 이런 나의 성향을 아시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계신다. 그럼에도 내가 ‘아버지와 데이트하기’를 내 버킷리스트에 넣은 것은 단지 효도하고자 함이 아니다. 아버지가 가진 위트와 유머, 화제가 끊이지 않는 박식함,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인생선배의 조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아버지와 데이트는 유쾌하기 때문이다. 너무 길지만 않다면.
떠들썩해야 할 명절 맛이 난다고 좋아하시는 아버지가 쓸쓸해하지 않도록 같이 고군분투하던 남동생이 회사에 일이 있다며 먼저 나가버리고 홀로 계신 아버지를 고요와 적막 속에 남겨두고 나서는 것은 내 몫이 되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도 인사가 길어진다.
“아버지 코로나 끝나면 해운대나 달맞이에서 데이트하기로 해요. 3월이나 늦어도 4월에는 가능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