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연수 떠나기

세월을 거슬러, 학생이 되어 주는 밥 먹고 공부만 하기

by now nina
나의 청춘은 꽃밭의 나라였다. 목말라 허덕이며 뜨거운 길을 간다.
나의 서늘한 꽃밭의 속삭임이 노래하며 점점 멀어 가는데
그때보다 더 곱게 울리는 것을 마음 깊이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헤르만 헤세-

누군가에게는 아주 사소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버킷이 된다.

필리핀 영어연수 떠나기가 그렇다.

젊었을 때는 돈이 없었고, 나이가 드니 시간이 없다. 교사들은 방학이 있어서 다녀 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유치원은 방학이 짧아 4주씩 시간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

영어 연수가 젊은 날 꿈이었냐고 물으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그럼 왜 오십이 넘어 '영어연수 떠나기'가 버킷이냐고? 공부만 하는 삶에 대한 로망이 있기 때문이다. 공부라고 해서 지금 미적분을 배울 수는 없지 않은가. 공부할 수 있는 기숙학원도 영어 말고는 아는 것이 없으니 영어이다. 2000년에 처음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부터 영어를 잘하고 싶기는 했다. 서바이벌 영어로 어찌어찌 질문은 했는데 대답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하나마나한 영어였다.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싶다는 기본 욕구도 무시할 수는 없겠다.

첫 조카가 집을 떠나 대학 기숙사에 들어갈 때 짐을 옮겨 주는 일은 맡아했다. 조카가 배정받은 기숙사는 구축이라 낡은 건물이었다. 이층 침대 2개와 책상 4개 화장실 1개가 딸린 건조한 공간이었다. 복도 끝에는 세탁실이 있고 아래층에는 식당이 있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조카를 혼자 두고 오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씩씩함을 가장한 조카가 귀찮아할 때까지 기숙사의 오래된 침대와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침대와 책상과 작은 옷장으로 살 수 있는 삶이 부러웠다. 주는 밥 먹고 공부만 하면 되는 그런 삶이라니!



좋은 엄마가 되려는 노력, 직장의 여러 가지 일, 남편과 시댁, 쉬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고지서를 처리하고 밥하고 빨래하는 자질구레한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기숙사 너무 좋다. 이모가 여기 있고 싶다.” 결코 조카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복잡한 어른의 삶 대신 공부라는 한 가지 목표만 있는 단순한 생활에 대한 바람이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청춘에 대한 회한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아이들 데리고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고 한다. 주중에는 공부하고 주말에는 휴양하며 너무 좋았다고 말을 한다. 무엇보다 밥 안 해도 되어서 제일 좋았다고 한다. 그래,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8주 프로그램을 다녀왔는데 나보고 한번 가봐라고 권한다. 8주가 아니라 4주만 다녀오려고 해도 가족 눈치가 보인다. 남편은 일하는데 아무리 방학이라 해도 나 혼자 좋자고 애 두고 갈 수가 없다. 뉴욕이나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을 때는 길어야 15일이었다. 남편에게 지나가는 말로 떠보았더니 역시나 한 달은 길다고 난색이다. ‘그럴 줄 알았다고, 필리핀에는 방안에 도마뱀도 기어들어 오고 나방도 날아다닌다는데 역시 안 가는 게 낫겠어'




경주에는 7~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장치들이 많다. 추억의 사진관에는 그 시절의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찰칵 소리와 함께 곧 벗어야만 하는 교복을 입고서라도 청춘을 잠시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는 조금 더 긴 청춘을 꿈꾼다. 해주는 밥 먹고 공부만 하면 되는 기숙학원은 세월을 거슬려 다시 학생처럼 생활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영어연수가 내 버킷인 이유이다.


이번에는 남편도 함께 갈 생각이다. 방에 도마뱀이 들어오면 잡아서 내보내거나 밤에 모기약을 뿌리는 데도 적격이고 무엇보다 새로운 경험을 같이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필리핀은 상대적을 저렴한 가격에 음식도 입맛에 맞고 주말에는 휴양도 즐길 수 있느니 남편을 설득하기 좋을 듯하다.

필리핀 성인 영어연수 프로그램을 뒤적이며 적당한 곳을 고르고 있다.

필리핀 어느 어학원에서 엉성한 발음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중년의 여성을 만난다면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란다. 그녀도 어쩌면 자신의 로망을 실현 중일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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