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불러내는 향기
혹시, 어떤 향기가 그대의 추억 속 한 장면을 불러낸 적이 있는가?
하늘을 가득히 채운 비릿한 비내음이, 조심스레 잡아보았던 첫사랑의 손가락을 떠올리게 한다거나, 텁텁한 먼지 냄새가 학창 시절 왁자지껄한 청소시간을 머릿속에 그려낸다던가. 이 ‘현상’은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다. 당황할 새도 없이, 어딘가에 잠들어있던 희미한 기억을 마치 사진처럼 뚜렷하게 현상해낸다. 낯선 추억이 당당히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낭만적인 이들의 몽상이라고 치부하기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 일련의 현상에 당해보았던 탓인지, 특별히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입시가 끝나고, 심심한 예비 대학생을 달래줄 이런저런 것들을 찾아 허송세월을 보내며 들었던 생각은, 어쩌면 내가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였다. 웃기지만 그래서 그 즈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지구 속을 탐험하는 쥘 베른 원작의 SF 영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표작으로, 인터넷에서도 간간히 회자된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여 쓰여진 소설로 유명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난해하다. 정말로. 졸릴 때 더 쏙쏙 이해되는 책이 있다면, 이 책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프루스트의 자서전에 상상을 끼얹은 격의 연대기적이며 자전적인 이 소설에, 왜 자신이 어린 시절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프루스트의 문장을 처음 접해보는 독자라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당황할 필요는 없다. 문장들이 몽롱하게 엉켜있다. 이 책이 그렇고, 프루스트가 그렇다. 읽지 않고 넘겨도 괜찮다.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일요일에는 미사 시간 전에 외출할 수 없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실제로 프티트 마들렌을 맛보기 전 눈으로 보기만 했을 때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빵집 진열창에서 자주 보면서도 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콩브레에서 보낸 나날과 멀리 떨어져 보다 최근 날들과 연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오랫동안 기억 밖으로 내던져진 추억들로부터 아무것도 살아남지 않아, 그 형태는 - 그리고 엄격하고도 경건한 주름 아래 그토록 풍만하고 관능적인 제과점의 작은 조가비 모양 - 이제 파괴되고 잠이 들어 의식에 합류할 수 있는 팽창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내가 지금까지 떠올린 것은 단지 그 잘린 벽면뿐이었다.)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마을 모습이 떠올랐다. 점심 식사 전에 나를 보내던 광장이며, 심부름 하러 가던 거리며, 날씨가 좋은 날이면 지나가곤 하던 오솔길들이 떠올랐다. 일본사람들의 놀이에서처럼 물을 가득 담은 도자기 그릇에 작은 종잇조각들을 적시면, 그때까지 형체가 없던 종이들이 물속에 잠기자마자 곧 펴지고 뒤틀리고 채색되고 구별되면서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단단하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 집 정원의 꽃들과 스완 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
마들렌을 먹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옮겨 적은 것이 이 소설이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7권에 달하는 방대한 장편을 저 마들렌 한 조각이 불러낸 추억들을 회상하면서 적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맛과 향, 냄새는 그만큼 기억에 있어서 강력한 역할을 한다. 지나친 설명일지 모르겠지만 덧붙이자면 2001년에 필라델피아의 레이첼 헤르츠(Rachel Herz) 박사의 팀이 냄새를 맡는 행위가 사진을 보는 것보다 기억을 떠올리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2009년에도 이스라엘의 예슈런(Yeshurun) 박사가 fMRI를 사용하여 향기와 기억 간의 연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기도 했다. 프루스트 현상이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는 뜻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모든 지나간 나날들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싶을 때 기억해낼 수 있다면,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텐데.” 내 멍청함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인간 기억력의 타고난 한계를 원망하곤 했다. 몇 달 간은 하루도 빠짐없이 일상을 핸드폰으로 찍고 사소한 사건까지 적어넣은 일기를 빼곡이 채워나가기도 했다. 어쩌면 이게 더 많은 추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더 많은 추억이 생기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서였다.
초등학생 때 억지로 검사받기 위한 일기를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풀어내고 싶은 감정이 있을 때 적어야 하는 게 글이다. 나는 마치 불로장생에 집착하는 진시황 마냥, 초점 없는 마음으로 셔터를 누르고 타이핑을 했다. 기록하기 위한 글에 추억이 담겨있을 리 없었다. 있다고 해도, 그 추억의 향기를 고작 일기나 사진을 보며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아쉽지만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자, 라는게 나름의 결론이었다. 조금은 우울했다.
다음날, 일기를 쓰지 않고 산책을 나갔다. 우울 혹은 권태를 씻어내는 데에도 좋은 방법이다. 산책을 하다보면, 굳이 바라지 않더라도 새로운 것들을 지각하게 되니까. 비도 왔다, 조금. 적당히 모자를 눌러쓰고, 비를 맞으며 저수지를 걸었다. 허공을 조용히 찌르던 물방울은 요란스럽게 흙으로 숨어들었다. 흙내음이 진하게 올라왔다. 어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2년 전, 친구들과 뉴욕 주의 산골짜기 생태 연구소에서 지내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 처음에 떠오른 건 그게 아니다. 비가 쏟아지던 날 계곡에서, 우비를 입고 바위틈에서 힘들게 디딜 곳을 찾던 때, 그 순간의 감정이 빗방울처럼 머릿속을 조용히 찔렀다. 잠시나마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자연스레 줌아웃, 주변의 풍경과 친구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행복해 보인다. 뜻밖에도, 행복한 순간을 추억할 수 있는 기회는 이렇게 쉽게 찾아왔다. 허무했지만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억을 기록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게, 망각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까. 과거의 나에게, 언제든지 순간을 추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물 받은 듯 했고, 내가 오늘을 행복하게 살고 마음껏 흘려보냄으로써 미래의 나에게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왠지 앞으로는 프루스트처럼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솟아나는 자존심이, 괜스레 마들렌이 먹고 싶어진다.
가끔 친구, 혹은 선배나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야, 남는 건 사진밖에 없어.” 글쎄다. 내일의 당신에게 추억을 선물해주고 싶다면, 코로 크게 심호흡 한 번 해보는 건 어떨까?
과거는 지성의 영역 밖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 숨어 있다.
- 마르셀 프루스트
References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저 / 김희영 역, 민음사, 2012년 8월 25일 발행
커버 이미지 출처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출간 이벤트, http://wallpaper.minumsa.com/losttime/
이미지 1. 애니메이션 <PSYCHO-PASS> 22화 중
이미지 2. http://egloos.zum.com/twinkletea/v/788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