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집을 비우는 날 엄마는 자유부인이 된다. 자유부인이된 엄마는 엄마의 엄마 생각이 난다. 지금 내가 엄마에게 효도하는 방법은 전화를 드리거나 만나서 엄마의 수다를 들어드리는 거다. 물론 나는 그다지 훌륭한 경청자는 아니기 때문에 내겐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내가 찾은 방법이 엄마를 모시고 나들이를 가는 동안 엄마가 실컷 수다를 떨 수 있게 시간을 드리는 거다. ㅎㅎ
엄마와 나는 참 많이 다른데 다행히 서로가 맞추어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엄마가 하셨던 얘기를 또 하실 때 끝까지 잠잠히 기다리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관심 없는 분야나 혹은 생각이 다른 이야기들은 아무런 대꾸 없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더라도 나도 엄마와의 나들이가 즐겁다. 내가 엄마를 모시고 가는 곳이 엄마에겐 별로 관심 있는 곳이 아니더라도 엄마는 딸과 함께 하는 시간 자체를 즐겁다고 말씀해 주신다. 네 덕분에 이런 데도 와본다고 하시면 딸도 뿌듯하다.
"엄마, 가고 싶으신 곳 있으세요?" 하고 여쭈면 늘 똑같은 식당 이름을 대시며 "ㅇㅇ 가서 밥이나 먹고 오자." 하신다. 나는 갔던 곳을 계속해서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는 딸이 오래 운전하거나 새로운 곳을 찾으려면 힘들까 하여 늘 그곳 이름을 대실뿐, 거기가 꼭 가고 싶으신 건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식당 이름을 대신다. 딸은 '특별히 가고 싶으신 곳이 있으시진 않으시구나'하고 해석한다. 그리고 나면 내 마음대로 장소를 정한다.아무렇게나 골라도 엄마가 좋아해 주시니 이런 면에서 우리는 잘 맞는다고 생각된다. 다만 엄마를 모시고 갈 때는 나도 처음 가보는 곳은 아닐 때가 많다. 내가 가 봤던 곳 중 엄마 모셔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장소 리스트 중 그날의 내 기분에 따라 장소를 고른다.
오늘은 경주다. 사실 어제 구룡포를 다녀와서 경주까지 운전은 좀 버겁다 싶긴 했는데, 황리단길에서 엄마랑 텐동을 먹으러 가고 싶었다.그래서 오늘은 국도로 가기로 했다. 운전 시간은 더 길어지지만 국도가마음은 더 편하니까.
황리단길 옆 주차장에 주차를 해 놓고 발길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걸어 텐동집에 도착한다. 평일인데도 가는 곳마다 사람이 많다. 바 테이블에는 자리가 있었지만 엄마랑 온 여행이니 조금 더 나은 자리가 나올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렸다. 앉은자리가 그림 그리기 딱 좋은 자리이지만 카페처럼 여유롭게 그림 그릴 수 없으니 살짝 아쉽다.
엄마랑 점심 먹고 황리단길을 이리저리 걸어 다닌다. 보이는 것들마다 손녀 이름을 부르며 "이거 우리 ㅇㅅ이 입으면 예쁘겠다." "이거 우리 ㅇㅅ이 좋아하는 건데." 하신다. 다음에는 딸도 같이 데려와야겠다.
엄마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에 "딸이랑 경주 놀러 왔어." 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니 아니면 이런데 있는지도 몰랐지. 우리는 경주 오면 보문단지나 가지." 하는 엄마 말에 괜히 우쭐해진다. 한옥 카페 2층에 자리를 잡았다. 한옥으로 둘러싸인 풍경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창 밖에 보이는 고양이의 움직임에도 엄마는 재미있어하신다.
돌아오는 길에는 손녀가 좋아하는 경주빵을 사서 딸의 손에 들려주신다. 경주빵을 차에 싣고 다시 국도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빠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신 엄마의 러브 스토리를 정주행(?)할 수 있었다. 중간중간 나도 들어서 아는 이야기들이 끼여있지만 처음부터 상세한 스토리를 듣기는 처음이네. "너 같은 딸이 태어난 거 보면 너네 아빠를 만나서 결혼하길 다행이지."의 결론으로 엄마의 러브 스토리가 끝이 날 즈음 대구로 들어온다.
몇 년 전만 해도 자식들에게 폐(?) 끼치는 게 싫으시다는 이유로 나의 나들이 제안에 퇴짜를 자주 놓으셔서 속상했는데, 그 사이 엄마도 나도 서로에게 맞춰온 것 같다. 자식이 효도하는 기분에 뿌듯한 것도 자식 된 기쁨이라는 설교를 더 이상 엄마에게 하지 않아도, 엄마는 내게 뿌듯한 기쁨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나이가 들어 함께 하는 시간이 서로에게 즐거운 것만으로 우리는 복 받은 모녀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