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반 어중간한 시간이다. 점심을 먹고 집안일을 대충 끝내놓고 또 나갈 준비를 한다. 저녁 준비도 하려면 나갔다 오기 빠듯할 것 같으면서도 올해 목표한 1일 1 어반스케치를 이어가고 싶었다.
짧은 시간에 금방 가서 그림만 그리고 돌아올 장소를 생각하다가 친구가 추천해 준 장소가 떠올랐다. 자주 가는 곳인데 내가 가면 그림 그리기 좋을 것 같다고 했었다.
백화점에 간 김에 내가 좋아하는 옷 구경도 슬쩍하고 서점으로 향했다. 창가에 책 읽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 친구 말대로 그림 그리기 좋은 장소였다. 앉을자리를 찾아보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데 책을 읽다 문득 고개를 든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하하하하. 친구의 아지트에 왔더니 어김없이 친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네. 친구의 옆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는 친구에게 이번 주에 점심을 제안을 했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들이 있다. 물론 친하게 지내면서도 인생의 여러 시기를 거치면서 자주 만나지 못하기도 하고, 연락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기도 하고, SNS로 소식을 접하기만 하기도 하고, 친구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듣기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관계가 소원해진 두 친구가 있다. 그 두 친구의 사이를 혹시라도 내가 이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우연히 그중 한 명을 이곳에서 만나게 된 거다.
다음날 친구네 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다시 만났다. 친구의 단골집에서 점심을 먹고, 친구가 가보고 싶었다던 그리고 내가 찜해 두었던 서점 옆 카페로 갔다.
최근에 다시 만나게 된 대학교 친구 얘기를 하길래, 관계가 소원해진 그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결론적으로는 두 친구의 입장이 모두 이해가 되는데 이어 줄 수가 없었다. 꼭 다시 이어야만 하는지 서로 의문을 갖기도 했다. 둘 다 자연스럽게 만날 상황이 있다면 만나겠지만 예전 관계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30년 지기 친구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나로서는 안타까워 무언가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평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시기마다 너무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과 연락이 끊어지는 것이 때로는 무척 아쉬운 일이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그 모든 사람들과 평생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평생에 진정한 친구 셋만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나 보다.
결국엔 서로에게 편한 인간관계만 남게 되나 보다. 서로 열심히 맞춰가고 배려하고닮아가겠지만, 사람은 모두 너무 다르다. 세월이 흘러가는 중에 각자 다른 경험을 하며 우리는 또 변해간다. 어릴 적에 잘 맞았다고 지금도 잘 맞을 수는 없다.
어느 순간 연락이 끊어지더라도 우리의 인생 가운데 만난 모든 관계가 소중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관계들 중 대부분은 추억으로만 남는다. 어느 시점을 함께 보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함께 자라 가고 추억을 공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관계는 충분히 소중하다.관계를 위해 노력도 하고 정성을 들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보내야만 하는 관계도 있다.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성숙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꾸준히 연락을 해서 유지하는 관계도 있지만, 상대방이 원하지만 나는 그럴 의지가 없는 관계도 있다. 그런 관계에 대해 내가 느끼는 죄책감을 떠오른다. 둘 다 편하지 않다면 관계를 꾸준히 이어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나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그들을 꾸준히 보살피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서 빠져나와야겠다.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 두 친구와 함께 모여 깔깔대던 시절이 지나가버린 것은 아쉽지만, 나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 또한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