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이 방학에 끼여 있는 덕분에 나는 생일날을 늘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 채운다. 그래서 주로 여행을 많이 가게 된다. 작년 생일엔 휴가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2박 3일 제주도 항공을 끊기도 했었다.
겨울방학 중에 생일을 맞은 딸도 엄마를 닮아 며칠 전부터 생일날 무얼 할지 골똘히 고민한다. 우리 집에서 파티플래너는 생일 당사자인 셈이다.(여자들에게 국한되긴 하지만)
아빠가 끓여준 누나의 생일 미역국을 먹고 초등학생인 동생은 혼자 학교에 갔다. 아빠도 출근을 하지만 점심때 만나서 같이 초밥을 먹기로 했다.
취향이 같은 엄마와 딸은 첫 번째 생일 이벤트로 미술관을 골랐다. 날씨가 엄청나게 추운데도 생일이라고 치마를 골라 입고 한껏 멋을 부린 딸과 집을 나섰다. 미술관에 가기 위해 네이버 지도에서 검색을 했더니 "휴무"라는 두 글자가 뜬다. 월요일이 아니라 휴무일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네. 대신 사진 전시회를 보러 가기로 했다. 보고 싶었던 전시회를 보지 못해 속상하겠다 싶은데, 딸은 이 전시회도 보고 싶었던 거라며 쿨하게 셀카에만 전념한다. ㅋㅋ 어릴 적엔 계획이 틀어지는 걸 무척 힘들어했는데(많이 울었지) 많이 컸구나.
엄마보다는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딸이 사진전을 보는 수준이 높다. 딸이 충분히 볼 때까지 엄마는 여유롭게 기다린다. 곳곳에서 사진을 찍어주며...
약속 장소에서 남편을 만나 셋이서 초밥집엘 간다. 회사 직원들이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중에 딸 생일을 위해 이 추운 날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나온 착한 아빠가 맛있는 초밥을 사 주고 다시 버스를 타고 회사로 들어간다.
아들이 빠졌을 때 아들은 좋아하지 않고 딸은 좋아하는 것들 - 미술관, 초밥, 쇼핑- 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같이 카페에 갈지 물었더니 집에서 쉬겠다니 사춘기 아들의 자유를 존중해 주고, 자유롭게 카페로 향한다. 딸이 좋아하는 와플을 파는 카페에 왔더니 주차할 곳이 없다. 계획을 바꾸어 근처에 있는 다른 카페로 가 케이크 한 조각과 음료를 주문하고는 각자 그림을 그린다.
저녁에 운동 가는 딸을 위해 늦지 않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문해 둔 케이크를 찾으러 갔다. 이번 생일에 레터링 케이크를 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딸에게는 설연휴라 주문이 힘들겠다고만 해 두고, 몰래 주문을 해 두었더랬지. 깜짝 선물이다. 차에 타면서 "오다 주웠어." 하며 본인이 그려진 케이크를 내민다. ㅎㅎㅎ 네가 좋아할 줄 알았지. 뿌듯하구먼.
딸이 좋아하는 갈비찜을 해서 저녁을 먹고, 케이크를 자르고 미리 준비해 둔 엽서도 한 장 내민다. 그리고 딸이 운동을 간 사이 심야 영화표를 예매한다.
설날 용돈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진 동생은 누나가 좋아하는 아이돌 앨범을 주문해 준다. 너무 감동이라며 갑자기 동생에 대한 찬사가 이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동생이 진짜 착한 편이야." 하며...ㅋㅋ 지난 일 년 "나 쟤 때문에 짜증 나." 하던 아이는 어디로 간 건가.
딸의 생일을 모든 가족이 진심 열심을 다해 보냈구나. 이렇게 딸의 생일을 보내고 작년 아들의 생일엔 뭘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내려고 해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우리 집 남자들은 "뭐 하고 싶어?" 물으면 늘 "몰라" 해 버리니까 요구사항 많은 여자들 생일날 화려하게 보내게 된다. 올해 아들 생일도 진심으로 시끌벅쩍하게 보내게 해 줘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