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말은 늘 무척 바쁜 시기이다. 성적처리와 생기부 입력에 더해 학생부 업무인 축제 준비로 바쁠 수밖에 없는 중에 코로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시시때때로 하게 되는 회의와 변경되는 준비사항들. 문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는 시간들이었다. 늘 이러다 방학식날 혼자만 학교에 남겠다고 징징거리면서도 손과 머리는 끊임없이 일을 한다. 주변 선생님들도 "요즘은 얼굴도 잘 못 보겠네. "하며 지나가시며 컴퓨터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내게 인사를 건네신다. 모든 기운을 다 써내고 진이 빠진 채 터덜터덜 퇴근하던 시간을 뒤로하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학이다.늘 하는 걱정과 달리 시간 매직처럼 때가 되면 또 바쁜 일도 끝이 나긴 한다. 모든 일을 말끔하게 끝내 놓고 학교를 나선다.
오늘 방학을 한 아들에게 점심을 차려주기 위해 바로 차를 달려 집에 도착했는데 친구들과 점심 먹고 놀다 오겠다는 전화가 온다. 자.. 그럼 바로 방학 계획에 돌입해 볼까? 바로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스케치북과 그림도구, 물 한 통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한다.
코로나로 회식이 없어져서 친목회에서 가족들과 끓여 먹을 샤부샤부를 주었는데 원어민 선생님이 안 갖고 가겠다고 해서 두 개를 가지고 왔더랬다. 어머님 댁에 하나를 갖다 드릴 생각인데... 들고 걸어가기는 무게가 좀 있다. 도보 거리 20분. 차를 타고 가서 어머님 댁에 세워두고 걸을까? 망설이다 계획한 김에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20분을 걷는 동안 몇 번이나 손을 바꾸어 준다. 아무래도 좀 무식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만은 뿌듯하다. 늘 어머님께서 반찬 잔뜩 싸서 갖다 주시는데 내가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들고 어머님 댁에 가니 굉장한 효도라도 하는 기분이다. 어머님께서 반찬을 갖다 주시며 "퇴근하고 와서 또 밥 하려면 힘들잖아"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 반찬도 감사하지만 일하는 며느리의 입장을 생각해 주시는 어머님 마음이 늘 감사하다. 어머님께서 안 계시길래 냉장고에 넣어 두고 내려오며 전화를 걸었더니 어머님께서 "벌써 왔지. 너네 집에 줄 반찬 그 뒤에 내놨는데." 하신다. 차마 그걸 들고 걸어왔다고는 말씀 못 드리고 이미 집에 왔다고 대답한다.
자.. 뿌듯한 미션 하나 완료하고 집까지 가는 길을 멀리 돌아가도록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한다. 잘 아는 길을 최대한 모르는 길로 돌아간다. 그렇게 걷다 보니 창이 크고 그림 그리기 좋은, 손님 없는 조용한 카페를 발견한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를 잡았다.
특별히 아름다울 것 없는 평범한 도시의 풍경. 건물과 상점, 전봇대와 주차된 차들... 지극히 평범한 장면이 그림이 되는 과정이 재미나다. 그림 같은 풍경이 아니라도 그림이 되는 것이 어반스케치의 매력이 아닐까? 물론 여행 중에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 시작된 취미이지만 이젠 낡고 볼 것 없는 풍경을 그려내는 것에도 쏠쏠한 재미를 느낀다.
그림을 그리는 사이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식어버렸다. 늘 원샷에 가깝게 커피를 마시던 습관이 그림을 그리며 사라져 버렸다. 카페에 커피를 마시러 오는 게 아니라 그림을 그리러 오다 보니 커피는 아무래도 찬밥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림을 끝내고서야 커피를 홀짝댄다. 식어서 맛이 없다. 아들에게 다 놀고 들어가겠다는 전화가 온다. 역시 여유롭게 커피를 즐긴 후 그림을 그릴만한 여유는 아직 없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길 때까지는 커피는 찬밥 신세로 남겨두어야 할 듯하다.
저녁에 어머님께 문자가 왔다. 마침 아버님 친구가 오셨는데 샤부샤부 맛있게 잘 끓여드셨다고.. 뿌듯한 방학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