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출근, 딸램은 등교를 하고 방학을 맞은 아들과 엄마가 집에 남았다. 아들은 방학했으니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멀리 가보고 싶다고 한다. 이 녀석이 이런 말을 할 때 풉 웃음이 나며 정말 내 아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용돈과 물, 헬멧을 챙겨주고 엄마가 위치 확인할 수 있게 핸드폰 데이터 켜 두라는 당부를 하고 아들을 내 보냈다.
그리고 바로 역시나 나도 나갈 준비를 한다. 오늘은 어느 쪽으로 걸어볼까 생각하며 가방에 그림 도구와 물을 챙겨 넣는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노트북을 흘깃 쳐다 보고 잠시 고민한다. 오늘 1시에 중3 우리 반 아이들 인문계 합격자 발표가 날 예정이다. 나이스에 접속해야 하니 노트북이 필요하다. 나갔다 와서 좀 늦게 확인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무겁겠지만 어쩔 수없이 노트북도 넣어준다.
집에서 나와 걷다 보니 아들이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보인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곧장 헤어진다. 우리는 각자 갈 길이 다르니... 멀어져 가는 아들의 사진을 찰칵 찍어둔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한 시간을 걸어 앞산 카페 거리에 다다르니 배가 고파온다. 주말에 왔을 때 줄이 잔뜩 서 있던 맛집이 눈에 띈다. 평일 이른 시간에는 역시 한산하고. 고민할 것 없이 식당에 들어섰다. QR체크를 하고 나니 백신 증명을 보여달라고 하신다. 혼밥은 없어도 되지 않아요? 했더니 일행이 없는지 묻는다. 이 식당엔 혼자 오는 사람은 잘 없나 보다.
기대에는 못 미치는 식사를 마치고 그림 그리기 좋은 카페를 찾아 나선다. 카페 문 앞에 서서 구도를 잡아보고 고개를 흔들며 다른 장소를 찾는다. 그렇게 찾은 오늘의 카페는 테이블 두 개 놓인 작은 카페다. 커피를 주문하고 테이블에 짐을 펼치니 "드시고 가세요?"하고 묻는다. 이곳은 디저트가 유명한 곳이라 대부분 손님들이 쿠키와 커피를 바로 사서 나간다. 주인이 바로 보이는 곳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민망하기도 하지만 나는 씩씩한 어반스케쳐다.
그림을 그리다가 12시 50분이 되어 노트북을 펼치고 나이스에 접속해 놓고 대기한다. 발표 시간에 맞춰 해당 창을 여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합격이라는 글자 사이에 후기고인 ○○고 합격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를 어째... 혹시나 해서 후기고 재배정도 체크해 두었지만 설마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이렇게 충격인데 어머니께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하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단 카페에서 나와 3학년 부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도 놀라시기는 마찬가지다. 이번에 커트라인이 왜 이렇게 높아진 거지. 재배정 체크해두어 천만다행이라며 나를 위로하신다.
녀석.. 공부 조금만 할 것이지. 너무너무 안 해서 혹시 실업계 가고 싶은데 부모님 허락을 못 받아서 일부러 성적 떨어뜨리려고 하는 거냐고 몇 번이나 진지하게 물었더랬다. 그때마다 식 웃으며 그건 아니라고, 고등학교 가서 공부할 거라고 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네. 내가 왜 이렇게 속상한지. 눈에 눈물이 고인다. 어머니도 당황하시고 경황이 없으셔서 횡설수설하신다. "이런 소식 전하게 돼서 죄송해요." 하니 "선생님께서 왜 죄송해요." 하신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고등학교 가서 할 거라고만 하던 녀석에게는 이 경험이 오히려 피가 되고 살이 될지도 모른다고 나 스스로를 위로한다. 아니 이 경험을 통해 번쩍 정신을 차리길 소망한다. 어머니를 위로하고 나를 위로하며 그림을 마무리한다. 그 아이에게는 내일 오전에 전화해야겠다.
집에 와서도 속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데 제삼자인 남편이 '자업자득이네' 하며 팩폭을 날린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커트라인이 이렇게 높아지면 떨어지는 사람이 없을 순 없고, 우리 학교에서 한 명이 떨어져야 한다면 조금도 노력하지 않은 이 녀석이 떨어지는 게 가장 공평하다. 팔이 안으로 굽다 보니 속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다음날 그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보다는 좀 나아요'하며 덤덤한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조금은 놓인다. 어제 이 소식을 듣고 내가 했던 여러 생각들을 아이에게 전한다. 1년 내내 내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던 녀석에게 이번만은 내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다 보면 인생의 모든 경험이 다 쓸모가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 아이에게 이 경험도 버릴 수 없는 귀한 경험이 될 거라 나를, 그 아이를 토닥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