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찍고 고흥 찍고 순천

by joyfulmito

친한 친구가 고흥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 가면 놀러 오라는 인사말이 우리 사이에는 지켜야 할 약속과 같다. 친구가 이사간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들과 장흥여행을 다녀오며 고흥을 들르게 되었는데, 가족들이 함께 간 여행에서 친구 집을 들를 수는 없었다. 시간도 짧았고. 하지만 고흥까지 갔다가 친구를 보지 않고 온 것이 빚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번 겨울엔 꼭 고흥을 다녀와야겠다 싶었다. 물론 이것은 내가 여행 건수를 만드는 수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고흥 친구 집에서 하룻밤 자고 오는 길에 순천에 있는 친구도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 고흥 가는 길엔 홀로 광양을 들를 계획도 세운다. 광양을 들르려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근처에서 내가 가 보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관광지가 아닌지라 전라도 여행을 가는 길에 많이 지나다니긴 했지만 광양에서 멈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전국 일주 도장깨기라도 하듯 나는 광양을 찍고 싶었다.

아침 9시. 선별 진료소에서 신속항원검사를 먼저 마치고 학교에 들러 해야 할 일을 마무리했다. 드디어 나 홀로 여행이다. 같이 점심 먹자는 동료 선생님들께 놀러 간다고 한껏 자랑을 하고 유유히 학교를 빠져나왔다. 운전석 옆에는 물병 하나 꽂아두고 내비게이션에 장소를 찍고, 팥 캐스트를 켠다. 여행 가는 길에 듣는 게 고작 영어 방송이라니 분위기 팍 깨는 듯 하지만, 나는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는 이게 더 재미있는 걸 어쩌겠는가. 나 홀로 여행이니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 시간을 채우면 되는 거지.


요즘 휴게소 음식에 시들해지는 중이긴 하지만 배도 출출해 오고 광양에서 혼자 맛집에 들를 생각도 아니기에 새우 핫바를 하나 샀다. 대구에서 광양까지는 2시간 거리. 광양이 이렇게 가까운 곳이었나 싶다. 광양에서 머물 시간은 1시간 반 정도. 광양에서 어디를 가볼까 찾아보다가 윤동주 유고 보존가옥을 골랐다. 볼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지만 요즘 문학관에 들르는데 꽤 재미를 들인 때문이다. 그곳에 잠시 들렀다가 경치 좋은 카페에서 그림 한 장 그리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주차를 하고 나니 해설사분이 설명을 해 줄지 물으신다. 가족들과 왔다면 가족들 눈치를 살피겠지만 나 혼자뿐이니 자유롭게 설명을 부탁드렸다. 가옥 대청마루에 앉아 밖을 내다보니 경치도 참 좋다. 섬진강 하류와 건너편엔 하동의 산이 보인다. 여기에 앉아 그림을 그릴까 잠시 망설이다가, 해설 중 소개받은 윤동주 시 정원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 유명한 윤동주의 시도 교과서 밖에서는 접해 본 적이 없으니 여기까지 온 김에 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지. 참 오랜만에 찬찬히 시를 읽는다. 여행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경험이다. 평소에 관심이 없던 것에도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


윤동주 시를 읽으며 정원을 걷고 차로 돌아오는 길에 광양 관광지도를 유심히 살핀다. 처음 김양식을 시작한 것을 기념한 김시식지가 있다니 또 호기심이 발동했다.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거리를 확인하니 차로 6분 거리라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살짝 보고 나오려고 했는데 여기에서도 해설사분이 설명을 시작하신다. 빨리 보고 가겠다고 할까 싶었지만 어느새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다. 질문까지 해 가며. 해설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여행지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는 것, 뜻밖의 장소를 발견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혼자 이런 곳에 여행을 온 게 낯서신지 사진을 찍는 분이냐고 물으신다. 혼자 여행을 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뿌듯함에 어깨를 으쓱해본다.

김시식지에서 나오니 2시가 넘어버렸다. 친구에게 가겠다고 한 시간은 3시.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한다. 여유롭게 카페에서 그림은 무슨. 점심도 못 먹고 약속 시간에도 늦게 생겼다. 나 혼자 돌아다니다 보면 늘 이렇다. 여행 DNA가 또 나대기 시작했다. 광양에서 유명하다는 빵집에 들러 빵 사고 바로 친구네 집으로 직진이다.


연고지를 옮겨 시골로 이사 온 친구 가족에게 나는 특별한 손님이다. 그동안 사람이 많이 그리웠구나.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그래서 쉬운 일이 아니다. 늘 내게는 언니 같았던 친구가 늦게 낳은 어린 자녀들을 키우느라 많이 지쳐 있는 모습이다. 지쳐 있는 친구에게 잠시나마 활력소가 되어 줄 수 있어 기쁘다. 오랜만에 떠는 친구와의 수다는 여자들에게 보약과 같다. 포장 따위 다 풀어 버리고 꾸밈없이 마음을 풀어놓는다. 그럴싸한 위로나 격려의 말이 없어도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된다. 지금까지 내게는 늘 고마운 친구이지만 어릴 적엔 친구가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서로가 미성숙했고, 신뢰가 부족했고, 두려움이 많았다. 그때도 우리는 꽤나 어른스러웠지만 30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의 관계는 차원이 달라진 듯하다. 우리는 충분히 안전하고 친밀하고 단단하다.

친구의 일상 속에서 지역민이 된 친구의 추천 여행지를 함께 걷고 추천 맛집에서 음식을 사고, 친구의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게임을 했다. 친구의 일상 속에서 여행자의 모습으로 바깥 풍경을 그리고 일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친구네 동네를 함께 산책하며 친구네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평범한 시골 마을을 마치 유명 관광지라도 되는 듯 사진을 찍기도 한다. 물론 그림을 선물하기 위해 친구네 집도 찍어 두었다. 겨울에 온 것이 못내 아쉬워 계절마다 사진을 찍어서 보내라고 해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누구나 흔히 가지는 마당 있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로망을 당당히 실현시킨 친구네 집을 계절별로 그려서 선물해야겠다.

순천에서 점심 약속을 해 두었으니 오전에 친구와 작별을 해야 한다. 어제 왔는데 벌써 가냐고 친구의 딸내미가 섭섭함에 풀이 죽는다. 친구도 방학마다 오라고 누누이 이른다. 너네 집이 내 별장이냐고 웃으면서도 다음 방학에도 꼭 와야지 하고 생각한다. 친구 덕분에 홀로 여행 와서 이렇게 편하게 쉬다 가는 내게 친구는 멀리까지 와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친구가 챙겨준 고흥 김을 차에 싣고 순천으로 향했다.


친구들과 약속을 정하면 장소는 주로 내가 정하는 편이다. 어디에 가서 밥을 먹을지 어디에 놀러를 갈지. 순천에 친구가 있는데도 습관적으로 순천 맛집을 검색해 두었더랬다. 하지만 역시 지역민 추천 맛집을 이길 수는 없다. 친구가 제일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데려가 밥을 먹고 친구가 제일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맛도 분위기도 경치도 친절함도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다. 곧 결혼을 앞둔 친구(나이는 나보다 많이 어리다)의 러브 스토리도 듣고 웨딩촬영 사진 구경도 한다. 결혼 15년 차를 넘어 버린 내겐 모든 게 풋풋하고 사랑스럽다. 결혼 후 아이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친구의 고민을 들으며 얼마나 귀여운지. 나이 어린 친구가 있다는 게 참 좋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같이 사진을 찍으며 함께 여행했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10살이나 어린 이 친구를 알게 된지도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한참이나 어린 친구에게 우리 천천히 같이 늙어가자고 하며 웃는다. 신나게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친구와 헤어지고 대구로 출발하려니 내 여행 DNA가 또 나를 부추긴다. 차에서 다시 내려 옥리단길을 홀로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예쁜 장면들을 열심히 담아 둔다. 딸이 좋아하는 김부각도 사고 유명 베이커리를 검색해서 케잌도 샀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고 차에 타면서도 여기까지 와서 바다를 못 봤네 하며 네이버 지도를 한번 더 열었다. 내가 생각해도 참 못 말리는 역마살이다. 바닷가로 다시 나가기는 아무래도 무리다. 저녁 시간 전에는 대구에 도착하겠다고 했으니 지금은 출발해야겠다. 행복하고 따뜻한 기억 가득 담아 대구로 돌아오는 길 다음 주에는 어디를 가 볼까 또 머리를 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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