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네. 방학인데 좀 더 누워있을까? "오늘 뭐 할 거야?" "또 걷고 그림이나 그리고 오지, 뭐."
내가 제일 힘들어하는 게 있다면 '하루종일 집에 있는 거'? 특별히 나갈 일이 없어도 나갈 일을 만들고, 갈 곳을 정한다. 오죽했으면 갓 두 돌을 넘긴 딸에게 '엄마, 오늘은 집에서 좀 쉬자."라는 말을 들었더랬다.
연말연시를 보내면서 집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특별히 할 일도 없으면서 오후에는 밖에 나가기 위해 부지런히 밀린 빨래를 돌리고, 밀린 청소를 한다. 아들이 점심 먹고 약속이 있다길래 점심 준비까지 하고 나니 오전이 훅 날아가버린다. 머리를 감고 나갈 준비를 하려니 피곤하다.
그래서 씻지 않고 그냥 나가기로 한다. 하하. 어차피 운동(걷기) 하러 가는 거니까 갔다 와서 씻는 게 좋다고 합리화한다. 아무도 만날 일 없다며 거지꼴을 하고 그림도구를 챙겨 집을 나선다. 30분 거리를 걸어가 필요한 것을 하나 사고 그 근처에서 그림 그릴 카페를 찾을 생각이었다. 첫 번째 카페는 뷰가 좋지 않고 두 번째 카페는 햇볕이 너무 들어오고 세 번째 카페는 주인이 점심을 먹으러 갔고 네 번째 카페는 문을 닫았고 다섯 번째 카페는 망하고 없고 여섯 번째 카페는 창가 쪽 자리가 다 찼고 일곱 번째 카페는 밖을 향하는 창문이 없고.... 오늘따라 내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기가 쉽지 않다. 날씨가 좋을 때라면 길에 서서라도 그리고 싶은 풍경이 많지만 이 추운 겨울엔 불가능하다. 비어 있는 세탁방이 탐나는 자리를 갖고 있지만 내겐 세탁물이 없다. 세탁물이라도 하나 갑자기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마음에 드는 자리에 미용실도 많고 식당도 있지만 단 돈 5000원으로 넉넉히 장소를 빌릴 수 있는 곳은 카페뿐이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 보니 집 근처에 돌아와 있고 1시간 반이 지나버렸다. 춥고 다리 아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다.
이래도 집에 안 들어간다고? 올해는 휴직했으니 매일 어반스케치를 하고픈 욕심이 있었는데 겨우 이틀 만에 펑크를 내고 싶진 않다. 집에서 다시 멀어지기 시작한다. 다시 첫 번째 카페를 지나고 두 번째 카페를 지난다. 그러다 마음에 덜 들었던 카페로 다시 돌아간다. 더 이상 이 추위에 돌아다니는 건 아니다. 마음에 덜 드는 풍경이라도 그려야겠다. 그래도 창이 넓고 창가 자리도 많이 비어있다.
따뜻한 말차라테를 한 잔 주문하고 자리를 잡았다. 햇볕이 정면으로 들어와 눈이 부시긴 하지만 생각보다 뷰가 마음에 든다. 그림 도구를 꺼내 들었지만 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손이 얼어서 선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따뜻한 말차라테로 손을 녹이며 지친 몸을 쉬어 준다. 내가 생각해도 이게 웬 고생인가 싶은데 이런 상황이 재미나고 이렇게 힘들게 자리 잡은 어반스케치 장소가 마음에 든다.
애초에 거지꼴을 하고 나와 오랜 시간 찬 바람을 맞고 돌아다녔더니 내 모습이 말이 아니다. 방학 첫날은 꼬질꼬질한 게 국룰이지. 늦잠을 즐기고 꼬질함을 즐기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 방학의 첫 단추를 잘 꿴 거라며 스스로를 칭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