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와 어반스케치로 방학을 보낸 건 지난겨울방학부터였다. 아이들이 이제 꽤 커서 나 혼자만의 시간이 많이 생겼고, 친구를 좋아하는 사춘기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오래가는 것도 환영받을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면 나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즐기기로 했다.
내가 마음 놓고 어반스케치를 하는 동안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가족과 엄마다. 함께 하는 동안 마음껏 그림을 그려도 미안하지 않고 눈치 보이지 않는 사람. 내가 그림을 그리는데 집중하면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나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지만 관계 또한 중시하는 나는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내 인생의 중요한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은 엄마와 동행을 하기로 했다. 지난번엔 갑자기 전화해서 "엄마 집 근처로 그림 그리러 가는데 나오실래요" 했더니 마늘 까고 있어서 못 나오겠다고 하시길래, 오늘은 그 전날 전화해서 엄마와 미리 약속을 잡았다. 오늘은 딸도 카페에 가고 싶다길래 삼대가 모이기로 했다. 물론 딸은 한 시간이나 걸어서 카페에 가긴 힘들다길래 버스 타고 따로 오라고 했다.
점심을 챙겨 먹고 약속 시간을 맞추려니 바쁘다. 결국 늦었다. 네이버지도에 37분이라고 찍히는 시간을 20분 만에 걸어갈 방도는 없다. 엄마에게 늦겠다고 천천히 나오시라고 했더니 벌써 집을 나서셨다며 내가 가는 길로 걸어오시겠다고 한다. 엄마도 나도 걷기 대장들이다.(내 동생들도 마찬가지다.) 다들 하루에 2시간씩을 어떻게 걷느냐고 하는데, 우리 식구들은 다들 엄청나게 걸어 다닌다. 유전인가 보다. 다리가 엄청 튼튼하게 타고났다.저 멀리에서 엄마가 걸어오시는 게 보인다. 엄마의 겨울용 최애 외투와 귀를 덮은 모자를 쓴 귀여운 우리 엄마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우리 엄마는 70에도 저렇게 귀여우실까. 단언컨대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할머니다.나를 보자마자 "모자를 쓰고 나오지. 겨울 햇볕에도 얼굴 많이 타는데."하고 내가 예상한 레퍼토리를 시작하신다. "아이고, 내 이럴 줄 알았지. 앞머리 오늘 자르러 갈 거니까 얘기 안 해도 돼." 엄마의 예상되는 다음 잔소리를 막아선다. '이쯤 되면 티키타카가 잘 되는 거'라고 설명해 두자.
30분을 걸어 엄마를 만나고 다시 30분을 걸어 원하는 카페로 간다. 딸과 만나기로 한 카페를 찾아들어갔는데, 엄마는 카페 음료를 싫어하시고(말차라테도 설탕 들어간다고 굳이 안 드시겠단다) 카페에서는 1인 1음료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한 명은 빵을 시키겠다는데 음료 기준 1인 1개를 시켜야 한다며 빵은 카운트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융통성 없는 카페라니!! 결국 우리는 다른 카페를 가기로 한다.
내가 어릴 적 살던 이 동네에 카페가 엄청나게 많이 생겼다. 예쁜 카페가 많고 옛날 가게들과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어 어반스케치하러 자주 오는 나의 최애 스팟이다. 찾아간 곳이 마땅찮더라도 다른 대안들이 가득한 동네다. 딸에게 전화해서 새로운 장소를 알려주고, 창이 크고 넓고 조용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엄마는 동네 구경을 좀 더 하고 들어오시고, 나는 시선을 그림에 고정시키고도 엄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여자들은 멀티플레이어라 이 정도는 하나도 어렵지 않다. 물론 그림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겠지만 나같이 취미로 그리는 사람들을 그림에 100퍼센트 에너지를 쏟지 않고 그저 즐긴다.
그 사이 딸이 도착했고 음료를 주문하고 우리 옆자리에 앉아 또 그림을 그린다. 엄마 따라 카페를 많이 다녀서 그런지 어반스케치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카페에서 그림 그리기를 즐긴다.
엄마는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엄마 이야기를 들을 때 조금 힘이 드는 부분은 몇 번이나 들었던 이야기가 자주 다시 반복된다는 점이다. 그 연세가 되면 나타나는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들었던 이야기인 티를 빨리 내기도 하지만, 엄마의 마음에 하소연처럼 수없이 덜어내야 하는 이야기들은 이제 그냥 잠자코 다시 듣기도 한다. 이게 내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효도라는 생각을 한다. 딸 없는 엄마가 서럽다고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딸로 태어난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기도 하다. 올해는 휴직도 했으니 엄마와 시간을 많이 보내드릴 생각이다. 나의 다짐과 노력을 엄마도 아시는지 언젠가부터 만났다 헤어질 때, 전화를 끊을 때 엄마는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으신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올 딸을 카페에 남겨두고 엄마와 먼저 카페를 나선다. 오는 내내 또 갖가지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는다. 엄마 집 앞에서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엄마는 바쁜 일 없으시다며 결국 우리 집 앞까지 같이 걸어 나를 바래다주신다. 연인이 따로 없다. 자식은 엄마들에게 영원히 애인이다. 우리 집 앞에서 헤어지면서 "오늘 고생했다." 하신다. 다시 엄마는 30분을 걸어 집으로 가신다. 걷기 좋아하는 모녀가 똑같이 2시간을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