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영화를 보고 늦게 잤더니 오늘 아침에 울리는 알람소리에도 눈이 떠지지 않는다. 늘 그렇듯 10분 타이머를 다시 맞추고 다시 눈을 감는다.
개학을 앞두고 있을 때는 개학 후 수업 준비를 하거나 새 학기 준비를 하곤 했는데, 다음 학기에 휴직을 하는 내게 준비할 일은 없다. 오늘은 학교에 가면 남은 출석부 정리나 해 놓고 그림이나 그리고 영화나 볼 생각이다.
어제 같이 영화를 본 아이들은 여전히 꿈나라를 헤매는 중이다. 자고 있는 남매를 집에 남겨 두고 가방에는 큐티책과 그림 도구를 챙기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역사 강의를 들으며 집을 나선다. 너무 추워서 다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나올까 잠시 고민했지만 시간을 너무 딱 맞춰 나왔다. 늘 그렇듯. 걸으면 곧 괜찮을 거라고 나를 달래며 힘차게 발걸음을 옮긴다.
어제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으니 오늘은 미드를 열심히 재생시킨다. 어렵지도 않은 걸 그동안 왜 그렇게 손 놓고 있었나 모르겠다. 오늘 온 공문을 분류해놓고 아이들의 졸업사진 폴더를 열었다. 졸업할 때 만들 학급신문에 아이들 얼굴을 그려 넣을 생각이다. 3년 내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의 노마스크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그림을 그린다. 졸업을 앞두고서야 아이들의 얼굴을 익히다니. 졸업 후에 밖에서 만나도 못 알아보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아이들에게 감동을 주고자 그림을 그리면서도 예쁘게 그려지지 않아 아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조심스럽다. 결국은 종이를 오려내네 몇 명은 다시 그렸다. 스캔해놓고 종이를 잘라 롤링페이퍼에 붙였는데 스캔한 파일의 해상도가 낮아 원본 느낌이 나지 않아 속상하다. 복사라도 해 두었어야 했는데.
내가 근무하는 날 친한 쌤들도 나와서 남은 일을 하시겠다며 점심 같이 먹자고 하셔서 내심 기대했었는데, 다들 일이 있으셔서 못 나오셨다. 괜히 섭섭하다. 신나게 수다 떨며 점심 먹을 생각에 발걸음도 가벼웠는데, 나 홀로 점심을 배달시키려니 서글프다.
게다가 오후엔 내가 좋아하지 않는 쌤들 세 분이 일 하러 나오셔서 수다 떠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그리고 깜짝 놀란다. 나름 사람들에게 편견 없고 포용력 넓다고 자부심을 갖던 내가 가장 사랑했던 학교에서 4년 만기를 채우고 떠나기 전에 싫어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가 말이다. 내가 이곳을 너무 사랑했던 게 문제인지도 모른다. 시골 학교처럼 정 많고 순수한 아이들을 선생님들도 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열정을 불태웠던 내 평생 가장 즐거웠던 교직생활을 이곳에서 경험했다. 그런데 새로 온 사람들에 의해 그 전 모습이 조금씩 변질되어 가는 것을 나는 용납하기 싫었던 것 같다.마치 내가 수호하고 싶은 곳을 파괴하는 사람들로 그들을 인식하며 마음껏 미워해도 된다고 착각했었나보다.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역사가 흐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것 또한 자연의 이치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주어진 터전에서 삶을 살았을 뿐이다. 덕분에 나는 미련없이 이곳을 떠나게 되는지 모른다.
그동안 내가 편견이 없고 다른 사람들을 넓게 이해한다고 자부했던 것은 어쩌면 그렇게 애정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크지 않아 미움도 크지 않았을 뿐이었나 보다. 이곳에서 깊은 사랑을 경험했고 동시에 미움을 경험했고 덕분에 나는 조금 더 겸손해졌다.
이 학교에 출근할 날이 4일 남았다. 챙겨 와야 할 짐의 양을 계산하고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을 계산한다. 4일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며 학교를 나선다. 아이들 졸업하는 날 울지나 않으려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