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으로 차를 몰아가던 남편이 말한다. "얘네는 여행을 너무 자주 다녀서 여행의 소중함을 모르겠다." "여행의 소중함 몰라도 상관없어. 나는 그냥 내가 여행 가고 싶어서 데려가는 거뿐이야." " 우리는 다 들러리네? 같이 가 주는 거 고마워해." "응,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문득 여행 중독자 엄마가 여전히 사춘기 두 아이를 데리고 마음껏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부지런히 데리고 다닌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행을 가는 차 안에서 다음 주에 서울 갈래? 하는 제안을 두 아이는 또 덥석 문다. 아이들 피곤하겠다며 애들 두고 혼자 갔다 오라는 말에 두 아이는 본인들도 서울 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 혼자 가는 게 더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두 아이와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걸 보면 사춘기 아이 둘과 엄마의 관계가 이 정도면 꽤 괜찮다 싶어 감사하다.
어릴 적 여행과 달라진 모습이 있다면 여행 다니는 내내 딸아이의 플레이 리스트 음악을 함께 듣는다는 점과 차만 타면 곯아떨어지던 아들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덕분에 3시간 30분 내내 한 숨도 자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들의 이런 변화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때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이제는 "이번 달 데이터 괜찮겠나?" 하는 잔소리 한 번 정도로 현실을 받아들인다. 레트로가 유행으로 리메이크곡들이 넘쳐나는 덕분에 딸의 플레이 리스트엔 내 귀에 익숙한 노래들도 꽤 많다. 물론 딸의 플레이 리스트를 나 또한 수도 없이 같이 들어왔으니(내 차를 탈 때마다 딸이 틀어 놓는다) 이 정도 들으면 엄마 또한 최신곡에 박사가 될 만도 한데, 나는 음악에는 젬병이다.
삼척으로 가는 길 삼 년 전에 갔던 울진을 지나가며 반가운 지명들을 읊는다. 후포항, 성류굴, 죽변해변 모두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처럼 반갑다. 코로나에 갇혀 힘든 시기를 보내며 떠나왔던 여행 중 아직은 어색한 마스크를 쓰며 사진을 찍던 기억이 난다. 이 일도 지나면 추억이 될 거라며 마스크를 쓴 채로 사진을 남겼었는데 그 이후 우리는 수많은 마스크 착용 사진을 남기고 있는지 모른다. 작년 산불로 타버린 벌거숭이 산들도지나간다. 작년 뉴스를 보며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다친 듯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일 년이 지난 지금도 벌거숭이 그대로 남아 있구나. 안쓰럽기 그지없다.
이번 여행의 첫 식사는 짜장면과 짬뽕이다. 시골 여행에서 꼭 우리의 한 끼를 책임져 주는 메뉴다. 우리나라 구석구석 어딜 가도 만날 수 있는 식당이 중국집 아닐까. 가격도 만만치는 않지만 낙지와 전복, 갖가지 해물이 푸짐하게 들어간 시원한 국물의 짬뽕을 먹는다. 어릴 적에도 늘 아빠는 짜장면, 엄마는 짬뽕을 시키셨는데 내가 꾸린 가정에도 예외 없이 남자들은 짜장면, 여자들은 짬뽕을 시킨다. 갑자기 조사해보고 싶네. 다른 집들도 많이들 그런지?
갈남항에 내리자마자 어른들은 바다 물 색깔에 먼저 시선을 보내고 아이들은 고양이에 마음을 쏟는다. 같은 곳을 여행해도 아이들과 우리는 다른 것을 경험한다. 그게 또 가족여행의 재미가 아닌가.
딸의 시선과 나의 시선
갈남항에서 구경을 하고 바로 그 옆 카페로 장소를 옮긴다. 여행 중 매일 카페를 들르는 게 우리 가족의 루틴이 된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카페 문화가 워낙 발달해서 가보고 싶은 좋은 카페가 너무 많이 생기기도 했고, 온 가족이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어반스케치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은 카페 밖에 없기도 하다. 엄마가 한 시간 남짓 그림을 그리는 동안 딸아이도 주로 그림을 그리고, 남편과 아들은 패드나 노트북을 꺼낸다. 남편을 패드로 책을 읽거나 일을 하기도 하지만 아들은 주로 게임을 한다. 책을 한 권 들고 다니자고 잔소리를 무수히 해 보지만 한 두 장 읽고 나면 주로 게임을 한다. 엄마가 그림 그리는 시간을 아들이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일인 것 같긴 하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마트로 간다. 이 또한 우리 여행의 루틴이다. 숙소에서 해 먹을 음식들의 재료를 몇 가지 담고, 아이들은 즐겁게 과자를 고른다. 어릴 적부터 과자와 사탕류를 꽤 엄격하게 제한해 왔지만 여행을 떠날 때면 일상을 끈을 조금은 풀어 라면과 과자를 즐겁게 즐겨왔다. 아이들이 여행을 따라나서길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취침 시간이 자유로워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넷플릭스가 있는 숙소이니 만큼 오늘 밤에도 함께 영화를 보며 늦게까지 간식을 먹을 예정이다.
아빠는 짐을 내려주고 근처 주차장에 주차를 하러 가고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짐을 잔뜩 메고 지고 계단으로 3층에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에 따라 올라온다.(물론 아빠 몫의 짐도 계단 아래에 더 남겨져 있다.) 아이들은 집이 넓고 예쁘다며 신 나하는 중에 숙소를 고른 나는 집이 너무 추워 당황한다. 펜션이라면 보통 주인분께서 따뜻하게데워놓으시지만 비번을 누르고 개인 체크인을 하는 에어비앤비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서둘러 난방 버튼을 눌러보지만 집이 쉽게 데워지지 않는다. 넓고 예뻐서 고른 집이지만 상가 건물 3층은 겨울철 보온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2번의 제주살이 집들도 외풍이 세고 추워서 여행 첫날 무척 당황했었더랬지. 한 달씩도 추운 집에서 살아봤는데 4일 여행 정도야 괜찮을 거야 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따뜻한 밥을 하고 마트에서 사 온 닭강정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먹는다. 다들 배가 안 꺼져서 저녁은 못 먹겠다더니 닭강정 한 통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낸다.
저녁을 먹고 다 같이 큐티를 하고 가져온 영어책을 조금씩 읽은 후 (집에서 문제집하는 시간을 대신해서 얇은 영어책 한 권씩을 들고 왔다. 물론 그것도 주말에는 프리패스지만) 영화 볼 준비를 한다. 아빠는 적당한 영화를 고르고 아이들은 먹을 간식을 준비한다. 오랜 시간 함께 여행해 온 우리에겐 꽤 많은 여행 루틴이 있구나. 모든 게 서로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어느새 내게 가장 좋은 여행메이트 3명이 생겨 있었구나.
친구들이 더 좋은 나이에도 여전히 엄마아빠 따라다녀주니 고맙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많이 다녀서 다들 아이들에게 좋겠다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고마워할 대상이 엄마, 아빠가 되는 세월이 금방이다. 우리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갈 적마다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것처럼, 나 또한 고마운 마음이 더 커져가겠구나. 그게 인생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