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로 삼척을 고른 이유는 단순하다. 아직 가 보지 않은 곳 목록에서 하나씩 지워가는 중이다.여행 대장은 나니까 여행 장소를 정하는 건 순전히 내 위주다. 엄마가 데려간 장소가 늘 좋았기 때문에 의심 없이 따라나서는 거 아닐까 하고 멋대로 생각해 버린다.
삼척은 가는 곳마다 물이 너무 깨끗하다. 지금까지 수많은 바다를 가 봤지만 어제 들렀던 갈남항의 바다 색깔은 제주 바다를 제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물색깔이 진짜 미쳤다. 몰디브 바다 색깔과 비교할 수는 없어도 깨끗하기로는 세계 어디를 내놔도 단연 으뜸이 아닐까 싶었다. 얼마나 깨끗하고 투명한지 수족관 따로 없다. 물속 물고기들이 불 밖에서도 한눈에 깨끗하게 보인다. 스노클링으로 유명항 수밖에 없겠구나. 지난여름엔 여길 두고 왜 욕지도로 갔던 건가. 여름에 왔어야 했는데 한 발 늦은 듯하다. 갔던 여행지에는 다시 잘 가지 않지만 기필코 이곳은 여름에 한 번 더 와야겠다.
환선굴 가는 길에 보이는 계곡, 환선굴 내의 고인 물들 또한 얼마나 깨끗한지 모른다. 삼척의 또 다른 유명 관광지인 미인폭포도 물색깔이 예술이라는데, 삼척은 다른 무엇보다 물이 으뜸인가 보다.
여행 둘째 날 늦게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고 삼척중앙시장에 들러 천 원짜리 핫바를 하나씩 사 먹고 환선굴로 왔다. 매표소 앞에서 딸이 '관람소요시간 1시간'이라는 안내를 읽고 "망했다"하고 중얼거린다. ㅋㅋㅋㅋ 딸은 많이 걷는 여행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환선굴을 얕보고 왔구나. 유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처음부터 산바람이 얼마나 강하게 부는지 모노레일을 타러 가는 길조차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모노레일에서 내린 사람들을 앞으로 보내고 나니 주변에 사람도 없고 조용하다. 여유롭게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기괴한 동굴 암벽들이 화성을 연상시킨다. 곳곳에서 감탄을 하며 사진을 찍으며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린다. 환선굴에는 화장실이 없다는 안내를 보고 화장실은 미리 다녀왔지만, 한 번 들어오면 앉아서 쉴 곳도 없다는 게 함정이다. 반쯤 걸었을 즈음 힘들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가능은 하지만 이미 반쯤 왔다면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으니까) 중간에 빠져나갈 수 있는 지름 길도 없다. 가뜩이나 목이 살짝 부은 딸은 마실 물도 없고 슬슬 지쳐 간다. 남편은 여기 중간에 카페가 있으면 한 잔에 이만 원에 팔아도 장사가 잘 되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한다. 아이가 지치면 엄마도 초조해진다. 언제쯤 끝이 나는지, 출구가 보인 듯하고도 한참을 더 돌아야지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개방된 곳은 전체 굴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니 가히 대단하다. 만장굴이 아무리 유명해도 강원도 굴은 스케일이 다르구먼.
모노레일에 내려서 바로 앞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간다. 배 고플 시간도 되었지만 우리에겐 당장 쉴 곳이 필요하다. 바닥과 돌 지형을 그대로 살리고 통나무로 뼈대만 만들어 비닐을 덮은 식당인데 간판과 전등이 아주 힙하다. 바삭한 감자전이 너무 맛있고 산채 비빔밥도 일품이다. 갈비탕이 조금 짜긴 하지만 이 날씨에 따뜻한 국물은 꼭 필요했고.
환선굴에 갔다가 강원종합박물관에 갈 예정이었지만 다들 지치기도 했고, 딸아이가 사진 몇 장을 보더니 "교장선생님들이 모아놓은 수집품 같은데?" 한다. ㅋㅋㅋ 인정인정. 다녀온 사람들의 평은 좋지만 우리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 그냥 패스하기로 한다. 바로 숙소 들어가긴 아쉽고 우리 카페나 가서 쉬자.
숙소 근처 한옥 카페에 가려 했는데 5시 반이면 문을 닫는단다. 다시 바닷가 카페를 찾아간다. 예전엔 여행 중 카페 가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카페에서 쓰는 비용이 부담되기도 했는데 어느새 이 모든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졌다. 이 시간이 소중하고 소중한 시간을 위해 소비하는 돈이 합당해졌다. 많은 것이 변해간다.
남편이 새해의 키워드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새해 첫 여행에서 새해에 하고 싶은 걸을 적어보곤 했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 남편의 질문도 성숙해진다. 막연하다고 생각한 질문에 어느덧 자란 아이들이 "성실, 끈기, 도전" , " 끝, 과정, 인내"라는 대답을 한다. 나름 새해를 계획하고 다짐하고 포부를 가지며 자라 가는 아이들이 기특하다. 아빠와 엄마도 "시작, 성장" "도전, 성장"을 고른다. 아이들이 자라 가는 만큼 부모도 자라기를 소망한다. 덕분에 한 해가 더욱 기대된다.
이제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또 영화 보자. 영화관에서 놓쳤던 공조 2를 넷플릭스에서 오늘 공개한다니 오늘 볼 영화는 따로 고를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