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에 다녀온 후 이틀을 집에 머물고 다시 가방을 하나씩 메고 집을 나선다. 1박 2일 여행에 내내 가방을 메고 다녀야 해서 최대한 가방을 가볍게 싸려고 했는데 가방의 무게가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여유분 옷을 챙기지 않아도 우산, 읽을 책, 여행 수첩, 그림 도구와 화장품 파우치, 지갑과 충전기만으로 가방은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다.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다. 서울역에서 내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속에 몸을 구겨 넣고, 사람 파도의 한 부분이 되어 조용히 계단을 걸어 올라온다.화장실에도 줄이 길게 늘어선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도 살짝 길을 헤맨다. 서울이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보이는 숭례문과 광화문, 이순신 동상, 경복궁...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운 마음으로 마음속으로 호들갑스럽게 마구 손을 흔든다.
빌딩 숲 사이 지하 식당가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빌딩 구석구석에서 일을 하던 직장인들이 잔뜩 쏟아져 나온다. 역시 줄을 선다. 식당에 줄 서는 거 딱 싫어하지만 이 시간 이곳에서 줄을 서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시간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일을 쳐내는 노하우가 있다. 줄을 서자 주문을 받고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이 나온다. 우육면 한 그릇을 뚝딱하고 나오는데 10분이면 족하다. 서울이구나.
오늘 우리가 계획한 일정엔 없었지만 마침 역사박물관이 눈앞에 보이길래 들어가기로 했다. 역사에 관심이 없던 딸아이다 웬일로 설명을 꼼꼼히 읽으며 관람을 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부분들에 관심이 생겼나 보다. 덕분에 아들이 지루해졌다. 중간중간 쉬어가기 좋은 벤치들이 있어 자리를 잡는다. 벌써 무거운 가방에 지치기 시작한다. 도대체 배낭여행은 어떻게들 하는지 모를 일이다.
서울에 처음 오려던 이유는 합스부르크가 컬렉션을 보기 위함이었지만 이미 표가 매진이라 가지 못하고,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전을 보기 위해 현대미술관에 도착했다. 1시 30분쯤이었는데 앞 시간은 모두 마감되고 다행히 4시 반 마지막 타임에는 대기를 걸 수 있었다. 무료전시회라고 다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210번 중 193번을 할당받았으니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이 전시도 못 볼 뻔했다. 여긴 서울이다.
3시간이 남았다. 바로 옆 북촌 마을을 둘러보고 카페에서 쉬기로 한다. 북촌 마을 초입에 겨우 당도했지만 우린 이미 지쳤다. 최단거리로 북촌 마을을 빠져나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한 자리가 비어 있어 그나마 대기 없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사는 것은 기본 피로도부터 다르다. 살기엔 대구가 더 좋은 것 같다며 내 고향에 후한 점수를 준다.
달콤한 티라미수와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 그림 한 장으로 지친 몸을 쉬어 준다. 엄마와 누나를 따라다니며 아들은 사진 너무 많이 찍는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찍어달라고도 하지 않고 거기 서 보라고도 하지 않고, 우리가 사진 찍는데도 5초면 그만인데. 이건 아주 양호한 거라고 아들을 설득한다. 네가 적응하거라.
드디어 이중섭전 입장이다. 제주에서 이중섭 미술관을 갔던 기억들이 소록소록 떠오른다. 역시 딸램은 꼼꼼히 관람하고 아들은 휘리릭 관람을 끝내고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딸은 기다리는 동생 때문에 최대한 시간을 줄이려 노력하고 아들은 벤치에 앉아 불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린다. 이 정도면 양호한 거라고 엄마는 만족한다. 유럽 여행을 데려가기 전 예행연습이 필요하다. 루브르 박물관도 30분이면 관람을 끝내 버릴 아들에게, 그런 동생과 평생 꿈꾸어 왔던 루브르 박물관에 함께 가야 할 딸에게, 그런 두 아이를 함께 데리고 다녀야 할 나에게.
버스를 갈아타고 숙소 근처에 있는 광장 시장으로 간다. 저녁으로 뭘 먹을지 살펴본다. 먹거리로 유명한 광장 시장엔 단점이 하나 있는데... 너무 메뉴가 한정적이다. 누구나 광장시장에 오면 이걸 먹어야 하나보다. 하지만 너무 맛있으니 용서해 주기로 한다. 오뎅을 하나씩 먹고 떡볶이와 김밥, 빈대떡을 주문했다. 그리고 시장을 나오면서 야식으로 먹을 닭강정을 한 통 손에 들었다.
시간은 6시 반밖에 안 되었지만 밖은 이미 캄캄하고 우리는 쉼이 필요하다. 들어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푹신한 호텔 침대에 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