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에 없는 육형(肉刑) [1]
1. 사후위좌 고수
1422년(세종 4) 12월부터 사후위좌(赦後爲佐) 정책을 시행한 이후로 전국 각지에서 도둑이 기승을 부리자, 다시 이전의 물론사전(勿論赦前)으로 회귀해야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임금은 매번 나름의 논리를 내세워 사후위좌 원칙을 고수하였다.
사후위좌 원칙이 처음 적용되고 8년째 되던 해 12월경 형조판서 김자지가, 도처에서 도둑이 날뛰는 상황을 우려하여, 사면 전의 전과까지 합해서 절도3범이면 사형에 처하게 해 주기를 청하자, 백성에 대한 신의와 절도범의 딱한 처지를 내세워 받아주지 않았다(세종 12년 12월 16일).
한때의 나쁜 짓을 미워하여 사면 이전의 죄까지 소급해 추궁하면 신의를 잃을 수 있다. 더구나 사면은 새로운 삶을 열어 주기 위해 과 거의 잘못을 청산해주는 것이니, 사면 전의 범행까지 합해서 처형하 면 죄를 용서해준 취지가 사라져 백성의 신뢰를 잃을 것이다. 또, 절도는 궁핍한 백성이 저지르는 것이라서 큰 죄악이 아니고, 그들의 사 정이 너무 딱해서, 절도3범은 사면과 상관없이 모두 죽이자는 제안을 차마 따를 수가 없다(세종 12년 12월 16일)
세월이 3년쯤 흐른 뒤에도 여전히 도둑이 기승을 부리는 상황이 변하지 않아서 예조판서 신상이 물론사전(勿論赦前) 정책의 복원을 건의하니, 네 가지 이유를 내세워 따르지 않았다(세종 15년 10월 23일).
첫째로, 법을 바꾸려면 기존의 법이 열 가지 폐단이 있고 새 법은 한 가지 폐단도 없어야 한다.
둘째로, 사면 이전의 죄는 불문 에 붙인다는 법을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어 고칠 수가 없다.
셋째로, 사람을 죽이는 일에 관계되는 법을 더 무겁게 고칠 수 없다.
넷째로, 도둑을 마구 죽인다고 해서 도둑이 쉽게 사라지겠는가?
하지만 단호하게 잘라서 말하지 않고, '장차 대신들과 의논해보겠다.'고 여지를 남기자, 형조판서 정흠지가 대안을 제시하였다. 2년 전부터(세종 13년 12월 20일~) 시행해온 신장불과본죄법의 폐단을 아뢰며, 피의자가 자백이 없었더라도 확실한 증인이나 증언이 있으면 유죄를 선고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건의한 것이다(세종 15년 10월 23일).
임금이 듣고 나서, "계목(啓目)을 갖춰서 올리면 장차 의정부와 육조(六曹)에 의논을 지시하겠다."며 즉답을 미루더니 논란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던 모양이다. 같은 날, 중앙과 지방에 절도가 횡행하여 신경이 쓰인다며, 형조로 하여금 도둑질을 단속할 방법과 도둑을 없앨 수 있는 대책에 대한 의정부와 여러 조(曹)의 의견을 수렴하여 아뢰게 하였다(세종 15년 10월 23일).
10여 일 뒤에 절도재범자들을 처자와 함께 바다 한가운데 외딴섬에 가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영의정 황희가 절도재범자들을 전라도의 자은도·암태도·진도 등지로 실어보내고, 관할하는 수령들로 하여금 엄중히 감시하면서 출입을 금하게 하기를 청한 것이 그대로 채택된 것이다. 이로써 유사 이래 처음으로 범법자들에 대한 강제적 ‘보안처분(保安處分)’이 시행에 들어갔다(세종 15년 11월 5일).
2. 발꿈치 힘줄 절단
사후위좌 정책이 시행된 지 13년째로 접어든 1435년(세종 17) 4월에 형조판서가 정흠지에서 신개로 바뀌었다(세종 17년 3월 27일). 그 무렵 전라도의 세 섬에 안치한 절도재범자들이 갖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전라도 감사와 자은도 암태도 진도를 관할하는 수령들의 관리와 감시가 소홀한 틈에 섬을 탈출하는 자들이 많았다. 육지에 상륙한 뒤에는 거의가 다시 도둑질을 저질러서, 감사로 하여금 매월 말에 서면으로 임금에게 상황을 보고하게 하였다(세종 17년 5월 21일).
그처럼 어려운 형국에서 형조판서가 된 신개는 취임하고 3개월쯤 지나서 도둑을 막는 데 필요한 대책을 자세히 기록한 「 도둑방지종합대책(안) 」을 작성하여 임금에게 올렸다(세종 17년 6월 14일). 어떻게 해서든지 도둑을 한 명이라도 덜 죽이려는 임금의 속내에 맞춰서, 대책의 한 가지로, 사면된 전과까지 합해서 절도3범이면 사형에 처하는 대신 발꿈치 근육을 끊어버리자고 제안하였다(세종 17년 6월 14일).
단근은 본래 아득한 옛날에 중국에서 노예와 평민들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다가, 한(漢)나라 문제 때 폐지된 형벌이었다. 따라서 명나라 형법전인《대명률》은 물론이고 조선에서 편찬한 《경제육전》과 《속육전》에도 없는 초법적(법외) 형벌이었다. 그런데도 신개는 임금에게 권도를 써서 단근을 시행하기를 청했으니, 임금이 매우 난처했을 법도 하다 .
신개는 단근정책을 제안하는 대목에서, 도둑들의 죄를 용서하는 사면이 도적들로 하여금 나쁜 버릇에 물들게 만들어, 구금에서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다시 도둑질을 한다며, 중국 송(宋)나라 때의 석학이자 성리학의 원조 격인 주자의 말을 앞세워 임금을 설득하였다.
일찍이 주자가 말하기를, ‘도형과 유형과 같은 형벌로는 도적질이나 음탕한 행동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면, 생식기나 다리를 끊는 형벌이 보다 더 적합할 것이다. 비록 몸은 불구가 되더라도 생명은 보전하게 될뿐더러, 못된 짓의 근원이 제거되어 다시는 함부로 나대지 못하게 될 것이니, 위로는 선왕(先王)의 뜻에 합하고 아래로는 시대상황에 적합한 형벌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오니 앞으로는 주자의 권유를 따라서, 도적에 대해서는 비록 초범일지라도 발꿈치 힘줄을 끊어서, 용이하게 걷거나 달아날 수 없게 만들면, 아무리 도둑질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게 되어, 설령 상을 준다 해도 다시는 도둑질을 안 할 것입니다. 또 발꿈치 힘줄을 끊는 형벌은 범법자에게 색깔이 눈에 띄는 옷을 입혔던 옛날 성인(聖人)들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생명을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전하의 덕에도 부합할 것입니다.
단근이 시행되면 종신토록 불구자가 되는 사람이 생기겠지만, 발꿈치 힘줄이 잘린 도적들로서는, 목숨을 잃는 대신 불구가 되어 수명을 채울 수 있게 된 것을 큰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라며, 발꿈치의 힘줄을 끊는 단근이야말로 도적을 응징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데 매우 적합한 형벌이라며, 다시 또 주자를 앞에 내세웠다.
주자로 말하자면, 그의 마음이 어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흉악한 자들을 제어하기가 어려워서 한시적 조치로 단근을 권했던 것이니, 발꿈치의 힘줄을 끊는 형벌을 도둑방지대책으로 시행하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단근을 영구적으로 시행하기는 곤란하여도, 한시적으로 시행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신개의 보고를 청취한 세종은 “장차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하였다. 이후로 1년이 넘도록 신개의 종합대책(안)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이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짐작컨대, 아무리 천하의 주자의 권유가 있었더라도, 즉위하면서 ‘어진 정치’를 다짐한 입장에서는, 중국에서 아득한 옛날에 쓰이다가 한(漢)나라 때 없어진 육형의 부활을 승낙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신들은 신개의 제안을 지지하며 임금을 압박하였다.
1년이 넘도록 임금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숙고만 반복하자, 사간원과 의정부가 순차로 나서서 정교하고 촘촘한 논리로 임금의 결단을 이끌어냈다. 단근은 팔다리를 끊는 것이 아니라 억세고 날랜 힘만 꺾을 뿐이라 생업을 도모하는 데 지장이 없다며, 사면된 범행까지 합쳐서 절도 3범이면 오른쪽 발꿈치의 오른쪽 힘줄을 자르는 정책을 밀어부쳐 법전에 없는 형벌(법외 형벌)이 시행되게 만든 것이다(세종 18년 윤 6월 14일, 8월 8일).
3. 시행착오와 정책변경
그런데 막상 단근을 시행하자 기대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효과는 고사하고 발꿈치 근육을 잘리고도 도둑질을 하는 자들까지 있어서, 오른쪽 발꿈치의 왼쪽 근육까지 절단하도록 법을 바꾸고, 단근에 참여한 관원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남기게 하였다. 이를테면 단근실명제를 시행한 것이다. 처음에 의정부에서 형조의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었다.
도둑질을 하다가 발꿈치 힘줄을 끊긴 뒤에도 이전처럼 달리고 걷는 자가 있으니, 《율문》의 보자례(補刺例)에 의거하여 다시 끊게 하고, 앞으로는 단근(斷筋)에 참여한 감독관과 옥졸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해두었다가, 힘줄을 끊긴 자가 전처럼 달리고 걸어다니면 과죄(科罪)하는 것이 어떻습니까(세종 19년 8월 12일).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으나 기대했던 효과가 뒤따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오른쪽 발꿈치의 왼쪽과 오른쪽 근육을 모두 잘리고도 도둑질을 하는 자들이 있어서, 왼쪽발의 앞쪽 근육을 자르게 하였다. 단근법이 시행되고 3년 반쯤 경과한 즈음에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임금에게 아뢰었다.
두 번째로 힘줄을 끊긴 뒤에도 도적질하는 자가 퍽 많습니다. 단근법은 힘줄을 끊으면 종신토록 폐인이 되어서 다시는 도둑질을 할 수 없으리라는 계산에서 채택한 것인데 징계효과가 거의 없습니다. 힘줄을 끊긴 지 두어 달 만에 또 도둑질을 하여서, 이름만 육형(肉刑)이지 도적을 막는 데 아무런 효과가 없으니, 앞으로는 왼발 앞쪽의 근육을 끊어서 효과를 시험해 보게 하소서(21년 12월 05일).
임금이 듣고서 그대로 윤허하였는데 이후로도 도둑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아니하자 임금이 70살이 넘은 형조판서 박안신을 의정부의 우참찬으로 보내고, 형조참판이던 정인지를 형조판서로 승진시켜 치도(治盜)를 혁신하게 하였다(세종 22년 5월 3일). 4개월이 채 안 되어서 형조판서 정인지가 사후위좌(赦後爲佐)를 백지화하고 무릎의 힘줄을 자르게 하자고 제안하였다(세종 22년 08월 29일).
절도죄를 범한 자를 힘줄을 끊는 것은 악(惡)을 징계하기 위한 것인데, 힘줄을 끊긴 자가 상처가 아물어 이전처럼 걸을 수 있게 되면 다시 도둑질을 하여서 도둑이 날로 늘어나니, 절도를 세 번 범한 자는 사면여부와 상관 없이 《대명률》에 따라 사형에 처하든지, 아니면 무릎의 힘줄을 끊어 버리면 다시는 도둑질을 못할 것입니다(세종 22년 8월 29일).
임금은 정인지의 건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것 같다. 장차 의정부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며 즉답을 미루더니, 두 달 반쯤 뒤에 형조판서를 바꿨다. 그런데 임금도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정인지의 후임으로 경상도 감사이던 남지를 앉히더니, 불과 20일 뒤에 남지를 중추원으로 보내고, 7년 동안 함길도 절제사로 나가 이썬 김종서를 형조판서로 앉혔다. 또 1년이 안 되어서 김종서를 예조판서로 보내고 유계문을 형조판서로 앉혔다(세종 23년 11월 14일).
그 사이에도 사형 대상이 아닌 절도3범은 왼발 앞쪽의 근육을 끊었을 것인데, 실록에는 약 3년 동안 단근 이야기가 보이지 않다가 재위 25년 2월에 단근이 중지되었다. 사면 전후의 전과를 합쳐서 절도 3범인 자들에게 경면을 시행하기로 정책이 바뀌면서 단근은 멈추게 한 것이다(세종 25년 2월 5일). 임금이 권도를 써서 형조판서 신개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한부로 시행에 들어간 것이 1435년(세종 17년) 7월의 일이니, 대략 8년 정도 단근이 시행된 셈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