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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인 Jun 08. 2022

[32] 엄형(嚴刑)

32년 동안 약 15,00명 처형

1. 범죄발생현황 집계     


18∼19세기의 이탈리아 형법학자 엔리코 페리(Enrico Ferri, 1856∼1929)는 ‘범죄포화의 법칙’을 제시하였다. 세균배양기에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면 일정량의 세균이 번식하듯이, 어느 사회든지 환경조건에 부합하는 일정양의 범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기는 범죄는 양이 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세종의 혁신적 형사정책에도 불구하고 사회불안을 유발하는 각종 범죄가 끊임없이 발생하여 백성, 형정담당자, 그리고 임금을 힘들게 하였다. 개국초반부터 국가차원에서 범죄통계를 수집하였다는 것은, 국가에서 각종 예방정책을 시행하여도, 다양한 유형의 범죄가 자생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단순히 범죄를 저지른 인원만 집계한 것이어서 범죄유형별 발생특성을 알기는 어렵고 결과물도 전해지지 않지만, 각 도에서 정기적으로 임금에게 감옥에 수감된 죄수들의 성명, 죄명, 복역기간 등을 기록한 「수도록(囚徒錄)」을 보고한 흔적이 보인다(태종 6년 4월 6일).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용서하여 석방해줄만한 범죄자가 오래 갇혀 있거나 혹은 오래 외방에 귀양을 가 있어도 스스로 진달하지 못하니, 참으로 불쌍하다. 사헌부ㆍ형조ㆍ순금사(훗날의 의금부)의 옥에 구금된 백성, 직첩(임명장)을 빼앗긴 사람, 각도에 부처된 사람들을 매월 초하루마다 갖추 기록하여 보고하게 하라(태종 8년 11월 27일).     


각 해의 범죄와 서울과 지방 관청에 노비로 배속된 자와 연좌되어 노비가 된 자와 강제노역에 처해졌거나 안치된 자의 살고 죽은 것을 기록하여 아뢰라(세종 4년 2월 8일).     


각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범죄인을 처결할 때에 용의자의 전과 유무를 아울러 조사하여, 전과가 있을 경우는 죄명, 범행 날짜와 장소, 회초리 혹은 곤장을 맞은 횟수 등을 문건에 기록하여 형조에 올려 보내게 하라(세종 12년 11월 24일).      


그보다 앞서 형조에서, 《대명률》 <명례율> 편을 따라서, 사죄가 발각되어 이미 판결을 내렸는데 다른 죄가 또 발각된 경우는, 뒤에 적발된 죄가 앞서 발각된 사죄와 죄질이 비슷하면 문제 삼지 말고, 죄질이 더 나쁘면 앞의 죄에다 뒤의 죄를 더하여 형을 정하게 하기를 청하여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형조에서, 서울과 지방에서 두 번 절도죄를 범하여 진도와 암태도에 격리시킨 죄수들에 대해 감사가 매월 말에 옥의 상황을 조사하여 문서로 아뢰게 하는 법을 세우게 하였다. 그보다 앞서 형조에서, 소재지의 감사와 수령이 전연 검찰하지 아니하여 잇달아 도망하여 돌아와서 도둑질을 자행한다며 그와 같이 건의를 올렸었다.(세종 17년 5월 21일).     


그 외에도 다양한 유형의 범죄사례들과 범죄자들에게 적용된 죄목과 재판결과를 요약한 기사들이 실록에 다양하게 실려 있다. 그 중에서도 법정형이 사형이었던 사건들은 사법처리 결과가 대부분 실려 있어, 집계와 분석을 통한 범죄발생실태 추론이 가능하다.       


2. 사죄 적발과 처벌     


세종은 비슷한 인뭉을 찾기가 여려울 정도로 어진 정치(인정·仁政)를 훌륭하게 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매사를 백성의 입장에서 역지사지로 판단하면서 사회적 약자들인 독거노인ㆍ고아ㆍ무의탁 노인ㆍ장애인 등을 성심으로 보살폈다. 


반면, 공동체의 기본적 질서와 규범을 송두리채로 파괴한 자들은 추상같이 다스렸다. 유교식 왕도정치를 따르면서도 신상필벌과 일벌백계를 중시하는 한비자식 법치를 준엄하게 펼친 것이다. 짐작컨대 한비자의 다음 말을 가슴에 새기고 그대로 따랐던 것 같다.     


군주가 나라를 다스릴 때는 법도를 분명하게 바로잡고 형벌을 엄하게 세워서, 백성들의 혼란을 구하고 천하의 재앙을 제거하고, 강자가 약자를 능멸하지 못하게 하고, 다수가 소수를 포악하게 대하지 못하게 하고, 노인들이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게 하고, 어린 고아도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보살펴줘야 한다.  <한비자>     


세종은 한비자의 말대로 법도를 분명하게 바로잡고 형벌을 엄하게 세우면서, 완력을 믿고 약자를 능멸하는 자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폭력ㆍ공갈ㆍ협박 등으로 순박하고 힘없는 노인ㆍ아동ㆍ여성ㆍ노비ㆍ귀화인 등을 괴롭히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명ㆍ재산ㆍ정조 등을 함부로 침해하거나 공동체의 기본질서와 신뢰관계를 무너뜨린 자는 한치의 용서도 없이 법정형 그대로 처단하였다.       


<표1>은 세종실록의 형정기사들을 취합하여 세종 재위기간 동안 사죄(죽을죄)를 저질러 사형선고를 받고 실제로 처형되었거나 감형으로 살아난 인원을 죄명과 처형방법별로 구분하여 집계한 것이다. 당연히 범인이 검거되지 않은 사죄사건은 통계에 포함될 수가 없었고, 그런 사건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가 없다.       

세종치세 32년 동안의 사형수 처형  및 감형 내역

표에서 보듯이, 세종이 임금이었던 31년 동안 1,500명 가까운 인원이 사죄를 선고받고 공권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세종 즉위년 11월부터 12월 사이에 태종의 격분에 의해 처형된 심온 등 4명도 포함한 통계다. 세종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명백히 태종의 뜻에 따른 것이었어도 세종치세 동안 처형된 경우라서 집계에 넣었다.      


죄명별로는 강도+명화도적 741명, 살인+치사+미수+모의 454명, 절도+횡령+도굴 137명 순으로 빈도가 높다. 처형방법별로는 참수 1,120명, 교수 126명, 능지처참 73명 순으로 빈도가 높다. 남존여비가 심해서 성폭력이 많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과 다르게 강간범의 처형빈도가 매우 낮은 것이 특이해 보인다.                   

3. 재위 막바지 잔혹사     


아래 <그림 1>은 세종치세 32년 동안의 연도별 죄수처형 인원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즉위하던 해부터 28년 동안은 매년 50명 안팎 수준에서 증감을 반복하다가, 재위 29년부터 31년까지 3년 동안은 갑자기 매년 150∼225명을 처형한 것으로 확인되어, 그 이유에 대해 궁금증을 품게 만든다.      

          

<그림 1> 세종치세 죄수처형 및  감형 추이 

다른 임금도 아니고 역대 어느 군왕보다도 어진 정치를 펼쳤다고 알려진 세종이 말년에 무더기로 죄수들을 죽였다니, 대체 어떤 죄수들을 무슨 이유로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처럼 많이 죽여야 하였을까? 더구나 그 시기에 세종은 장성한 두 아들과 왕비를 잇따라서 잃은 충격으로 거의 불교에 의지해서 지내지 않았던가?             

의문을 풀기 위해, 처형 인원이 폭증한 3년 동안 처형된 죄수들의 죄목 분포를 확인해보니, 재위 29년 7월부터 재위 31년 10월까지 약 28개월 동안 606명의 죄수가 처형되었고, 그 중 524명(87퍼센트)이 도둑(강도 448명+절도 76명)이었다. 나머지 82명은 살인 31명(5퍼센트)과 기타 51명(8퍼센트) 순이었다. 


2년 반이 채 안 되는 단기간에 그토록 많은 인원이 강도죄와 절도죄로 처형된 이유를 추적해보니, 공권력으로 통제가 곤란할 정도로 도둑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초강수를 두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나라의 치안이 사실상 붕괴된 원인은 임금이 도둑들을 동정하여 관용을 베풀었다가, 가뭄, 사면, 우마수출 같은 복병들이 끊임없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전 같았으면 마땅히 사형에 처해졌을 도둑들을 한 명이라도 덜 죽이려고 법전에 없는 격리(隔離), 단근(斷筋), 경면(黥面) 같은 형벌까지 시행한 사실도 확인되었다. 한마디로, 세종치세 최악의 정책실패로 꼽아도 무방할 정도로 치명적인 오점이라고 생각되고 실록에 사료도 풍부하여, 전체 줄거리를 네 개의 장으로 나누어 차례로 소개해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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