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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인 Jun 08. 2022

[13] 신형(愼刑)

 사죄삼복법(死罪三覆法) 부활

1. 사죄 3회심리 의무화    


사죄(死罪) 사건은 반드시 세 차례 심리를 거치도록 한 사죄삼복법이 국내에서 처음 시행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때도 시행된 흔적이 있다. 고려의 열한 번째 왕이었던 문종(재위 1046~1083)이 명하기를, “사형판결은 삼복을 기다려 처리하여 잘못된 판결로 억울하게 죽는 죄수가 없게 하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고려에서 시행되었던 사죄삼복법을 채택하여 정종을 거쳐서 태종 때까지 이어져왔다. 하지만 처리기간 지체에 따른 폐단이 심하여 태종 연간에는 사죄라도 두 차례 심리로 사건을 종결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태종실록》에. "사죄 사건은 반드시 두 번 심리(복고·覆考)하라."고 어명이 내려진 기록이 보인다.

      

이후로 중앙과 지방의 사형수는 형조에서 고핵하여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 의논을 통해 결정이 이뤄지면 임금에게 아뢰고 재가를 받아서 시행하는 것으로 법식을 삼으라(태종 14년 6월 9일).     


세종이 즉위하고  나서 사죄삼복법이 부활하였다. 재위 3년째 되던 해 연말 무렵, 재복과 삼복을 할 때에 초복 결과를 꼼꼼히 살펴보고 의견을 정해서 아뢰라는 어명이 내렸다. 형조에서 재복과 삼복을 할 때에 초복 기록을 살피지 않아서, 사죄 사건이 잘못 처리되는 사례가 생길 여지를 없애기 위함이었다(세종 3년 12월 22일).     

하루 뒤에 형조판서 이발이 앞서 형조에서 실수로 교형을 참형으로 잘못 판결한 사실을 깨닫고 바른대로 아뢰었다. 임금이 듣고 나더니, 옛날부터 형을 결단할 적에 두세 차례 반복하여 아뢰게 한 것은 좋은 법률이라며, 신중하게 검토하여 다시 판결하게 하였다(세종 3년 12월 23일). 


사죄삼복법은 명칭 그대로 법정형이 사형으로 되어 있는 형사사건은 예외 없이 세 차례 심리를 거쳐서 죄와 벌을 정하도록 규정한 법이며, 초복·재복·삼복으로 구분되었다.      


초복은 사건발생지의 사법행정책임자(팔도 감사와 한성부 윤)가 용의자가 자백한 사건의 전모를 형조 상복사를 통해 임금에게 아뢰고 지침을 받았던 절차를 말한다. 그리고 초복에 앞서 용의자에게 신장을 가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지만취초(遲晩取招) 단계가 있었다.     


재복은 사건발생지의 사법행정책임자가 초복결과를 토대로 용의자의 죄와 벌을 임시로 정하여 형조 상복사를 통해 임금에게 아뢰고 지침(가이드라인)을 받았던 것을 말한다. 삼복은 사건발생지의 사법행정 책임자가 재복결과를 토대로 용의자의 죄와 벌을 정하여 형조 상복사를 통해 임금에게 재가를 청했던 것을 말한다. 재복과 삼복을 위한 심의를 복심(覆審)이라고 하고, 복심의 결과를 임금에게 아뢰는 것을 복계(覆啓)라고 하였다.    

사죄삼복제도


2. 사죄 수사절차 개선


그런데 지방에서 이따금씩 삼복을 거친 사죄 사건이 잘못 처리되는 경우가 발생하여, 지방의 사죄 사건 심리방법을 바꿨다. 이전에는 사죄 용의자를 관할권을 가진 수령이 혼자서 심리하게 되어 있던 것을, 감사가 강직하고 명민한 수령을 차사원으로 임명하여 사건이 발생한 고을의 관원과 함께 심리를 진행하게 한 것이다(세종 4년 10월 16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령과 차사원의 관점이 다르거나 혹은 심문이 서툴러서 살릴 사람을 죽이고, 죽일 사람을 살리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게다가 범행을 자백한 강간 용의자가, 법관이 사형을 선고하자, 강간을 자백하면 나라에서 피해자인 상대 여성을 자기에게 줄 것으로 믿고 허위자백을 하였다고 말해, 지방의 사죄 사건 심리방법을 또 바꿨다.     


사헌부가 사건을 조사하고 나서, 법대로 하면 마땅히 사형을 구형해야 하지만 그대로 사형을 구형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을 경우는, 먼저 임금에게 아뢴 뒤에 형조에 넘겨서 형조가 법에 따라 처리하게 하였다. 이전에는 사헌부가 사건을 조사하고 나면, 설령 사형에 처하기에는 의심되는 부분이 있어도 곧바로 임금에게 재가를 청했었다(세종 9년 10월 8일).     


지방에서 사죄 용의자가 검거되면, 1차로 감사가 차사원을 지정해 관할 고을의 수령과 함께 심문하게 하였다. 그 결과가 올라오면 용의자를 다른 고을로 옮기고 차사원 2명을 새로 지정하여 용의자를 다시 심문하게 하였다. 그 결과가 또 올라오면 감사가 직접 용의자를 면담한 뒤에 형조에 보고하게 하였다(세종 12년 12월 3일, 4일).     


그러자 이번에는 중앙에서 문제들이 불거졌다. 먼저 형조의 업무 폭주로 복심이 허술하다는 지적이 있어 실무자 2명을 증원하였다. 정랑 1명과 좌랑 1명을 늘려서 사죄 사건 복심만 전담케 하고, 상복사의 서열을 높여서 고율사보다 위로 하였다(세종 12년 12월 1일, 29일).     

서울에서 사형수를 추핵할 때도 당해 당하관 2명이 당상관에게로 가서 함께 사실관계를 조사하여 실체적 진실을 밝히게 하였다. 지방은 사죄 용의자 조사에 관한 규정이 《육전》에 상세히 적혀 있는 반면, 서울은 공식절차가 없는 상태에서 당하관들이 제3의 장소에서 용의자를 조사한 뒤에 당상관에게 결과를 보고하여, 형벌을 신중히 쓴다는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세종 18년 5월 12일).      


형조 상복사에 사죄 사건을 접수하였는데 마땅히 적용할 만한 법조문이 없으면, 비슷한 조문을 적용해 형을 더하거나 감하여 의정부에 올리게 하였다. 《속육전》〈형전〉에, 형률에 마땅한 조문이 없으면 의정부에 상복(詳覆)하게 되어있는데도, 형조 상복사의 관원들이, 도움도 안 되면서 시간만 걸린다는 이유로 임금에게 직접 올렸기 때문이었다(세종 18년 11월 28일, 21년 5월 3일).     


3. 의금부에 사죄삼복 지시 


국왕 직속의 특별사법기관인 의금부의 관할로 되어 있던 사죄 사건도 반드시 삼복과 상복을 거치게 하였다. 이전까지는 왕명을 받들어 왕족 범죄 국사범 반역죄 강상죄 등을 처리하면서 사죄 사건도 초복만으로 죄를 정하여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례가 생길 가능성이 높았었다.     


사간원이 계기를 제공하였다. 처음에 수청이라는 대궐의 시녀가 왕실의 재물이 보관된 창고의 물품을 훔친 혐의로 의금부에 갇혔다. 의금부에서 조사를 마치고 형률에 따라 수청을 참형에 처하고 가산을 몰수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임금의 윤허가 내렸다.      


사간원 지사 고약해가 나쁜 본보기로 후세에 전해질 가능성을 제기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의금부가 관할하는 사죄 사건도 반드시 세 번씩 심리하게 하였다(세종 8년 6월 24일). 10년쯤 뒤에 별시위 이석철이 자신의 아내가 친정 조카와 간통하였다고 무고한 사건을 의금부에서 처리한 기록에 상복과 삼복을 행한 흔적이 보인다(세종 18년 6월 1일).      


의금부의 사죄 사건에 대한 삼복은 형조의 사죄 사건에 대한 삼복과 다른 차원의 발전적 진화였다. 즉결재판을 제도적으로 막음으로써 통치자가 사사로이 형벌권(사법권)을 오남용할 여지를 차단한 것인데, 이후의 왕들이 다시 예전대로 되돌려놓았다.     


4. 옥사(獄死) 방지책 시행


한편, 사죄삼복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가져왔다. 오판에 의한 사형을 막는 데 기여한 순기능과 더불어서 심각한 역기능이 야기된 것이다. 주된 원인은 삼복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이었다. 특히 지방에서 사법절차가 진행되는 경우는 형조와 공문을 주고받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어 처리 기간을 줄일 수가 없었다.   


옥송의 지체로 인한 폐단이 매우 심했다. 마땅히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해져야 할 흉악범이 삼복이 끝나기 전에 사면을 받아 석방되는 사례가 잦았다. 옥에서 삼복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옥졸이나 다른 죄수에게 폭행 또는 학대를 당하는 경우가 흔하게 생겼다. 


무엇보다도 옥에 갇혀서 삼복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죄수가 무더위, 추위, 영양실조 등으로 병에 걸려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자주 생겨서 특단의 대책을 세워 엄정히 시행하게 하였다.       


첫째로, 죄수가 옥사하면 감사가 정밀하게 살피고 검사하여, 고문 법규를 어겼거나,  의복을 야박하게 주었거나, 의원의 치료를 받지 못해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지면 그 수령을 즉시 파면하게 하였다. 

둘째로, 죄수가 옥사한 원인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어도 1년에 2인 이상을 죽게 한 수령은 복무 성적을 평가할 때 자세히 따져서 반영하게 하였다. 

셋째로, 의금부에 갇혀있던 죄수가 죽으면 사헌부로 하여금 추핵하게 하였다(세종 20년 11월 28일).


하지만 기대한 만큼의 효과가 뒤따르지 않았던 것 같지 않다. 재위 21년(1439) 윤 2월 기준, 사죄 용의자 47명이 옥에 갇혀서 삼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갇힌 지 3년 된 자가 12명, 2년 된 자가 14명, 1년 된 자가 21명이었다(세종 21년 윤 2월 30일). 형조에서 그 주된 원인으로 삼복제도와 의정부의 무성의를 지적하였다.      


저희 형조에서 사건을 다시 자세하게 조사하느라 사죄 용의자가 오래 갇혀있는 경우도 있고, 의정부에 보고하였으나 회신이 없어서 처결을 미루고 또 미루다가 몇 해를 지난 경우도 있어서, 차꼬와 수갑의 고통과 가산의 손실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큽니다. 반드시 처형될 자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연루자나 죄가 의심되어 처형되지 않을 자들까지 고통을 겪다가, 굶주림, 추위, 질병 등으로 죽는 일이 생기니 온당치 못합니다. 앞으로는 사죄 사건이 발생하면 《속형전》의 규정에 따라 기한 내에 용의자 신문을 마치고 결과를 저희에게 보내면, 저희가 그 내용을 상세하게 복심하여 의정부로 올려 보내 전하께 아뢰게 하시옵소서. 아울러서 그 시한을 1년으로 정하고, 매년 연말에 의정부•형조•승정원이 상세히 복심하느라 판결이 미뤄진 사죄 용의자의 수를 전하께 아뢰게 하시옵소서(세종 21년 윤 2월 30일).      


이후로 전에는 없었던 허위보고가 성행하였다. 지방의 죄수가 장기간 구금되거나, 과도한 고문으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혹은 굶고 떨다가 죽으면, 담당 관리가 문서를 날조하여 보고하고, 감사 역시 확인하지 않는 실정이 드러나, 수감되었던 죄수의 사망보고서가 형조에 접수되면 재차 면밀히 검토하여 아뢰도록 법을 세웠다(세종 24년 9월 12일).     


하지만 이후로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중앙과 지방에서 발생한 사죄 사건들을 서로 공문을 주고받으며 여러 차례 상세히 복심하느라 해를 넘겨서 옥에 갇힌 채로 죽는 자가 적지 않다고 하니, 수령의 복무성적을 평가할 때 옥사한 인원을 반영하는 기준을 구체적으로 정하게 하였다.     


1년 동안 사죄 혐의자 2,3명과 경죄 혐의자 2인을 죽게 하였으면 상등을 줄만하여도 중등을 주고, 사죄 용의자 4명과 경죄 용의자 3인을 죽게 하였으면 하등을 주게 하였다. 단, 구금된 기간이 짧고 고문이 없었는데도 갑자기 죽었거나, 병이 들어서 형벌을 전혀 가하지 않고 보석으로 풀어주었는데 죽은 경우는 사망인원 계산에서 빼게 하였다(세종 24년 11월 23일). 


하지만 이후 세종이 세상을 뜰 때까지 약 8년 동안의 실록을 꼼꼼히 뒤져봐도, 죽을죄를 지절러 삼복을 기다리다 옥사하는 죄수가 줄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비록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선한 의도로 펼친 정책이더라라도, 뜻하지 않은 악을 부를 수 있다는 교훈을 깨우쳐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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