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병인 Jun 08. 2022

제3장 타파(打破)

과도한 고문(拷問) 없애기     

1. 태종의 형구사용 제한     


태종 재위 4년(1404) 10월 전국의 지방관아에 모든 형구(刑具)를 《대명률》에 규정된 규격과 표준에 맞게 다시 제작하라는 어명이 내렸다. 전국 각지의 많은 고을에서 율문의 규정을 잘 몰라서 범죄혐의 추궁이나 형벌의 집행에 쓰이는 여러 형구들을 임의로 제작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옥사를 결단할 때 율문을 살피지 아니하고, 태를 써야 할 때에 장을 쓰고, 장을 써야 할 때에 신장을 쓰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 같다. 또, 볼기를 쳐야 하는데 허리를 때리고, 채찍은 넓적다리에 때려야 되는데 등을 때려 죄수가 죽는 경우도 빈번했던 것 같다. 네 가지를 고치게 하였는데, 세 가지가 신장의 표준규격과 사용법을 고치라는 것이었다(태종 4년 10월 28일).      


첫째. 《대명률》을 세속의 언어로 번역하여 두루 나눠줘서 전국의 관리들이 배워서 익히게 하라. 

둘째. 지방에서 사용하는 가쇄ㆍ태ㆍ장ㆍ수갑 등을 모두 율문에 의해 제작하라. 

셋째. 관찰사가 형률의 규격을 고찰하여 율문과 다르면 수령을 처벌하라.      


태종은 또 피의자를 신문할 때 형장을 치는 규정을 마련하였다. 먼저 육조에 명하여 신장 수를 상의하여 정하게 하고, 형조에서 의정부와 육조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리한 그대로 정했다(태종 17년 5월 11일).


첫째. 신장은 1차례에 최고 30대를 넘을 수 없고, 신장을 때린 내역을 적어두어 뒷날 참고가 되게 한다. 

둘째. 신장의 체제와 가격 부위는 의금부의 예를 따른다. 

셋째. 목판으로 무릎을 누르는 압슬은 1차에 2인, 2차에 4인, 3차에 6인으로 하고, 십악(十惡)·강도·살인 이외에는 압슬을 쓸 수 없다. 

넷째. 서울에서 형벌을 관장하는 관청들은 신장을 시행할 때마다 반드시 문서에 기록해두고, 끝까지 실정을 얻지 못했어도 신장을 시행한 내역을 함께 보고해 남형을 방지한다. 

다섯째. 서울의 담당관청은 반드시 교지를 받아 구속하여 문초하되, 응당 신장을 가하여야 할 자라도 반드시 미리 보고한 뒤에 시행한다. 

여섯째. 지방 각 고을의 수령은 응당 신장을 가하여야 할 자라도 반드시 먼저 감사에게 보고한 뒤에 신장을 가한다. 임의로 재결할 수 있는 경죄를 제외하고, 신장을 가한 뒤에는 다시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매 분기 마지막 달에 각 고을에서 죄수에게 신장을 가한 내역을 서울의 예에 따라 문서로 보고한다. 

일곱째. 서울과 지방의 관리 가운데 임금의 흠휼정신을 무시하고 법을 어겨가며 어지럽게 형벌을 쓴 자와, 서울의 사헌부와 지방의 감사로서 범죄 용의자의 친속이 임금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게 만든 자는 율에 따라 논죄한다.     

2. 죄수(용의자) 염려 대물림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형구의 사용과 관련된 적폐를 근절하기 위한 혁신을 다양하게 추진하였다. 형구를 잘못 쓰면 죄수가 부당하게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정도가 과하면 영구히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부왕이 재위 중에 기초공사를 확실히 해놓은 덕분에 다른 혁신에 비해 많이 쉬웠을 것이다.      


재위 2년째 해 1월에, 죄수에게 칼[枷]을 씌울 때는 반드시 형률의 규정을 따르게 하고, 위반자는 법에 정한 대로 처벌하게 하였다. 《대명률》에 죄수에게 칼[枷]을 사용하는 기준이 명시되어 있는데도, 중앙과 지방의 관리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죄수의 목에 칼을 씌우는 적폐가 심했기 때문이었다(세종 2년 1월 10일).     


관리들이 아전이나 백성의 등에 매질을 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당(唐) 나라 때 태종이 일찍이 침이나 뜸도 자리를 잘못 잡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서 죄수들의 등을 때리지 못하게 하였는데, 서울과 지방의 관리들이 아전이나 백성이 조그만 잘못을 저질러도 느닷없이 등에 매질을 가하여 목숨을 잃게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세종 2년 11월 5일).     


의금부와 형조에서 상시 쓰는 신장과 똑같이 교판(較板)을 제작해 서울과 지방에 포고하였다. 그전에 의금부에서 양식을 만들어 서울과 지방에 배포하였는데, 햇수가 오래되면서 신장의 정확한 규격의 종적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세종 3년 6월 9일).      


그때까지 각 관아 별로 《대명률》의「옥구도(獄具圖)」를 보고 신장을 제작해 사용하다 보니 규격이 들쭉날쭉하였다. 또, 중죄를 범한 증거가 명백한데도 자백하지 않으면 과도하게 신장을 가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새로 나눠준 교판에 새겨진 신장(訊杖)은 길이가 3척 3촌이었다. 1척 3촌 이상은 원지름이 7푼이었다. 2척 이하는 넓이가 8푼이고 두께가 2푼이었다.     


형관이 부득이하여 형장을 쓰게 될 때에는 상하 관하들이 회의하여 사실을 조사한 뒤에 함께 한 청에 앉아서 거행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엄히 다스리게 하였다. 단 한 차례의 형장에도 살과 피부가 상하기 때문에 고도의 조심이 필요할뿐더러, 만약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이 형장을 맞으면 원망을 품어서 천지간의 화기(和氣)를 떨어뜨린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세종 5년 5월 28일).      


절도 용의자를 신문할 때 난장과 신장을 함부로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관리가 절도용의자를 신문할 때, 진술내용이 범죄사실과 동일하여도 조사를 빨리 마치려고 신장을 함부로 때리거나, 급히 자백을 받을 욕심으로 마음대로 난장을 행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이었다(세종 12년 10월 28일). 

   

죄수에 대한 채찍 사용을 규제하였다. 죄의 경중에 따라 10대, 20대, 50 등으로 구분하여 채찍을 가하도록 지시하였다. 도호부사나 그 부하 관원은 채찍을  50대까지만 사용하게 하고, 위반자는 제재하게 되어있는데도, 서울과 지방의 관리들이 10대만 가해야 할 사람에게 50대를 가하는 사례까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가죽 두 쪽을 겹쳐서 기워 채찍을 두껍게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하고, 머리털을 붙잡아 빙 돌리기도 하였다.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몸에 상처를 입고 숨을 거두는 경우도 있었다(세종 17년 9월 30일).      


3. 고문치사 방지대책 시행     


첫째로, 지방에서 형정을 담당하는 관원들이 무리하게 가혹한 형벌을 절대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서울에서는 옥에 갇힌 죄수가 죽는 경우가 드믄데, 지방은 죄수가 배꼽 아래에 종기가 나거나, 가슴과 배가 답답하다고 호소하다가 죽는 경우가 잇따랐기 때문이었다.      


필시 급하게 실정을 얻고자 하였거나, 형벌을 과도하게 썼거나, 참혹하게 고문을 가해서 그 독(毒)이 장기로 들어가 부종이 생겨 죽는 것으로 여기고 다섯 가지 대책을 마련하여 전국의 관하에 내려주었다(재위 21년 2월 2일).      


첫째. 피의자에게 신장을 가할 때 등·볼기·정강이·장딴지 등을 때리지 못하게 하였다.

둘째. 의금부에서 고문할 때에 묶어서 옆으로 눕히고 넓적다리와 정강이를 옆으로 때리다가, 크게 상처가 생기면 돌려 눕히고 때리게 되어 있는 규정을 그림으로 그려서 중앙과 지방의 각급 관아에 배포하였다.   

셋째. 《속형전》의 규정에 따라, 서울이나 지방의 관리가 법을 어기고 남형한 사실이 발각되면, 서울은 사헌부가, 지방은 감사가 죄수 친족의 고발을 접수하여  엄히 다스리게 하였다.    

넷째. 《등록형전》의 규정에 의거해, 서울이나 지방에서 죄수를 신문할 때, 사령이 큰소리로 꾸짖으면서 좌우로 나눠 서서 번갈아 가며 신장을 가하는 고문방법을 금지시켰다.      

다섯째. 죄수를 혹시 손으로 두 귀를 잡고 세게 잡아당겨서 상해를 입히거나, 두 귀밑의 머리를 벌어진 나무 틈에다 놓고 당겨서 가죽이 붓고 눈귀가 찢어지게 하거나, 신장 30대를 가한 뒤에 형장의 끝으로 상처를 찌르거나 심각하게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둘째로, 용의자를 고문을 할 때에 신장(訊杖)을 가하는 요령을 작성해 배포하였다. 의정부에서, 앞서 그림으로 그려서 각 관아에 내려준 고신도(栲訊圖)에 형장을 가하는 위치가 애매하게 표시된 부분이 있어서, 신장을 치는 관원들이 모르고 잘못 치는 일이 생길 가능성을 제기한 데 따른 조치였다.      


용의자에게 신장을 가하는 요령의 핵심은 죄인을 모로 누이고 무릎 아래를 옆쪽에서 때리되, 위로는 무릎 위까지 이르지 않게 하고, 아래로는 옆구리까지 이르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세종 21년 10월 17일).     


4년쯤 뒤에는 용의자로 지목되어 이미 매질을 당한 자에게 곧바로 다시 또 매질을 가해 자백을 받아서 죄를 정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 고문을 행한 뒤에 다시 또 매질을 할 때는 경과한 일수와 매질로 인해 생긴 상처의 경중을 참작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신장을 가한 죄수는 곧바로 죄를 정하지 말고, 고문 이후 경과한 날짜와 상처의 경중을 감안하여 다시 태장을 가해 죄를 정하게 하였다. 형을 쓰는 관리들이 죄수를 여러 차례 고문하고도 며칠 사이에 또 태장을 가하거나, 하루 종일 고문을 하고서도 태장을 더하여, 죄수가 죽는 일이 종종 생겼기 때문이었다(세종 25년 10월 8일).  


2년 뒤인 재위 27년에는, 설령 사형에 처해질 죄수라도 법을 굽혀서 매를 때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어쩔 수 없이 매를 가해야 할 상황이면 되도록 긍휼(矜恤)을 다하라고 형조에 특별히 지시하였다(세종 27년 11월 18일). [끝]

작가의 이전글 제4장 순화(醇化)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