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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병인 Jun 08. 2022

제4장 순화(醇化)

공권력의 야성(野性) 없애기 

1. 형벌만능주의 배격     


대사헌 신상이 임금에게 내자시(궁중의 물품창고)의 물건들을 못 쓰게 만든 전임 담당자들에게 배상금을 물리기를 청했다. 관리와 점검을 소홀히 하여 빗물이 자주 새서 옷감과 재물이 많이 썩었다며 모두 물어내게 하자고 건의한 것인데, 임금이 25살 연상의 대사헌을 점잖게 타일렀다.      


예외 없이 모두 징수하면 무고한 자가 걸려들 수 있다. 결백한 자에게도 배상금을 물리는 것보다 죄가 있는 자까지 덮어주는 편이 더 낫다(세종 1년 9월 19일).      


술을 금지할 적마다 청주를 마신 자는 한 사람도 걸리지 않고, 탁주를 마시거나 술을 사고 판 사람들만 단속에 걸리자, 임금이 지신사 원숙을 부르더니, 단속하지 말아야 할 경우와 철저히 단속해야 할 경우를 들려주고는,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아뢰게 하였다.  

   

술을 금하는 기간이라도 부모형제를 환영 혹은 환송하거나, 나이가 많거나 병이 있어서 약 삼아 마시는 사람에게 술을 파는 경우는 단속하지 말고, 단지 놀이를 목적으로 술을 마시거나, 부모형제가 아닌 사람을 환영 혹은 환송하기 위해 마시려는 사람에게 술을 파는 행위만 금하는 방안을 의정부와 육조와 대간과 더불어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세종 2년 윤 1월 23일).    

 

의주도 첨절제사 양안식이 새로 건조한 병선 20척을 압령하고 서울을 다녀가던 길에 해주에서 풍랑을 만나 배 6척과 병사 58명을 잃어서 임금이 안식을 의금부의 옥에 가두게 하였다. 며칠 뒤에 호조에서 배가 난파되어 물에 잠긴 쌀을 안식에게 변상시키기를 청하니, ‘배가 난파한 것이 불확실하다면 물어내게 할 수도 있겠지만, 난파한 것이 분명한데 변상을 물리면 되겠느냐.’라며 물리쳤다(세종 2년 5월 2일, 11일).     


강원도 감사 황희가 백성들에게 꾸어준 곡식을 일부만 거둬들이고도 모두 받은 것처럼 회계장부를 조작하여 구황이 필요한 시기에 차질을 빚게 한 관내 수령들을 적발하였다.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모두 잡아다가 국가를 속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거론하지 말라고 회신을 보냈다. 이유인즉슨, 농사를 망쳐서 노부모와 아이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흩어지려는 사람이 지천인 판국에 환곡 회계장부를 조작한 수령들을 문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세종 6년 2월 5일).     


우산·무릉 등지의 안무사 김인우가 병선 두 척을 거느리고 무릉도를 가서, 부역을 피해 그곳으로 달아난 남녀 스무 명을 붙잡아 육지로 압송해오다가 풍랑을 만나서 선군 46명이 탄 배 한 척을 파도에 쓸려 보냈다. 스무 명을 붙잡기 위해 사십여 명을 잃은 셈이라 예조참판 김자지가 잡혀온 자들을 처벌하기를 청하니, 다시 도망치지 못하게 충청도의 오지 고을로 보내서 3년 동안 세금과 부역을 면해주게 하였다. 몰래 타국으로 달아난 것이 아닐뿐더러, 그 사이 사면이 있었기 때문에 죄를 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세종 7년 10월 20일).     


날씨가 차가운 겨울에 임금이 노량진을 건너 금천까지 자서 매사냥을 구경하고 돌아오다가 강가에서 발이 묶였다.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치고 물결이 거세져 배를 띄울 수가 없어서 언덕 위에 있는 새로 만든 큰 배 옆에서 시간을 보내다 다음날 새벽 4시 무렵에 강을 건너서 대궐에 이르렀는데, 사헌부에서 예조판서 신상과 정랑 정갑손을 탄핵하였다.                     


임금이 눈보라를 만나 추운 들판에서 공포에 떨며 밤을 보내는데도 백관들을 모아 임금의 안부를 확인하러 갈 생각을 하지 않은 죄를 따지라고 한 것인데, 임금이 사헌부의 장무를 부르더니, 본인이 경솔하게 강을 건너가서 생긴 일이라며 신하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세종 9년 1월 20일, 21일).          


강원도 감사가 장계를 올려서, 백성들이 나라에 공물로 바치는 곡식과 잡물을 싣고 오던 배가 강이나 바다에 침몰하여 유실되면 운송하던 아전에게 변상시키기를 청하니, ‘가난한 사람이 물에 빠져 의복을 잃는 것도 가엾은 일인데 변상까지 시킨단 말이냐.’라고 회신을 보냈다(세종 10년 윤 4월 11일).    

 

사헌부에서 음주를 제한하여 헛된 소비를 줄이고 예의와 풍속이 유지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르지 않았다. 규찰이 공정하지 못하여 왕왕 빈궁한 자가 우연히 탁주를 마시다가 붙잡히는 수가 있고, 부유하여 호강하는 자는 날마다 마셔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어서, 형평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승낙을 거절한 것이다(세종 11년 2월 25일).     


국법준수를 약속하고 귀화하여 함길도에 거주하던 여진족 가운데 죽은 형의 아내나 사촌 여동생을 첩으로 삼아 풍속을 어지럽히는 자가 많아서, 사헌부에서 함길도 감사에게 공문을 내려 단속과 처벌을 명하기를 청하니, ‘추핵하지 말고 현지의 관원으로 하여금 엄중히 금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세종 11년 9월 6일).  


임금이 경기 북부 지역으로 강무를 나갔는데 매사냥에 쓰는 해청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예조판서 신상이 임금에게, 응사(鷹師·매 조련사)가 제대로 길을 들이지 못해서 도망친 것이라며 응사를 처벌하기를 청했다. 임금이 대답하기를, “농사철이 닥치기 전에 내가 매사냥을 보려고 그에게 훈련을 독촉해서 생긴 일이니 응사는 죄가 없다.” 하고, 도망친 해청을 잡아오는 자에게는 해청을 새로 포획한 예에 의하여 상을 주겠다고 알리게 하였다(세종 13년 2월 13일).  

   

재위 14년 정월 중순경, 노비 소송을 전담하던 형조의 도관에서, 자기들도 송사를 심리하는 과정에서 필요하면 신장(訊杖)을 가할 수 있게 허락해주기를 청하니, 의정부와 육조에 내려주고 의견을 물었다.      


다음날 조회에서 토론에 붙이니 찬반 의견이 갈렸다. 임금이 찬성론자들을 겨냥하여, 이제까지 형벌을 쓰지 않던 관원에게 새삼 형벌을 쓸 수 있게 허용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좌우를 살폈다. 도관의 청을 들어줄 수 없다는 뜻을 에둘러서 밝힌 것인데, 예조판서 신상과 형조판서 정흠지가 한 목소리로 도관의 애로를 아뢰었다.     


도관은 형벌을 쓸 수가 없어서 증언과 증거가 명백하여도 도관의 판결에 불복하며 억지를 부리는 간악한 무리들이 있다며, 도관의 요구에 힘을 실어준 것인데, 아무런 소득도 없이 임금의 근엄한 질타만 들었다.      


도관의 관원은 백성의 부모라고 불리니, 도관의 송사는 말로 캐물어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 도관에서 형벌을 쓰지 않고 조사를 벌여도 그 위엄에 압도되어 허위자백을 하는 자들이 생기는 마당에, 고문까지 허용하면 되겠는가. 하물며 형벌은 줄이는 것이 좋은 것인데, 없던 법을 새로 만들어 민생을 해롭게 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세종 14년 1월 16일).     


이전에는 절도 3범은 교수형에 처해오다가 재위 4년째 해 12월에 사면받은 절도 범행은 전과계산에서 빼도록(사전물론·赦前勿論) 정책을 바꿨다. 그런데 이후로 도성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도둑이 날뛰어 군신이 함께 모여 치도(治盜) 원칙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예조판서 신상이 예전처럼 사면 이전의 범행도 전과 계산에 포함하기를 청하니, "도둑을 마구 죽인다고 도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은수하였다(세종 15년 10월 23일).   

   

재상의 딸이며 조정 관원의 아내였던 어리가라는 여인이 평상복 차림으로 거리와 마을을 돌아다니다 사내들의 꼬임에 넘어가 실행을 저질렀다. 사헌부의 대관과 사간원의 간관들이 합동으로 상소를 올려서, 어리가를 사형에 처하고 사내들은 먼 지방에 유배하기를 청하니, "남녀 사이의 정욕은 법으로 규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물리쳤다. 


강원도 감사 권맹손이 형조판서 정연·경기 감사 이사관·좌부승지 권채·우부승지 이계린·동부승지 성염조를 청하여 철원 민가에 모여서 술자리를 벌였는데, 사헌 지평 이영상이 아전을 보내 현장을 염탐하고 탄핵하였다. 참석자 전원이 피혐하려고 하니 임금이 영상을 불러서 불문에 부치라고 지시하였다. 영상이 그대로 넘어가면 민폐가 많을 것이라고 염려를 밝히니, "큰 사건도 아닌 것을 탄핵한들 무슨 죄로 다스리겠느냐."라고 알아듣게 타일렀다(세종 19년 10월 3일).


2. 천륜의 불가침성 훈시       


재위 3년째 해 3월경, 나라의 각종 행사에 사용하는 장막의 공급을 관장하던 충호위의 제거였던 임군례(정 4품)가 겁 없이 상왕(태종)을 비방하였다가 저자에서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에 처해졌다.      


죽은 임군례는 한족으로 귀화하여 통역관으로 조선 개국에 기여해 공신에 책봉된 임언충의 아들이었다. 그런 그가 부정을 저지르다 적발되어 품계가 강등된 것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글로 불손하게 상언을 올렸다가 졸지에 처형된 것이다. 글을 몰랐던 군례를 대신해 상언을 써준 정안지도 수사과정에서 거짓말을 하였다가 목이 베이었다.     


그런데 군례가 처형되고 20일쯤 지나서 사헌부 집의 심도원이 군례의 아들 맹손의 불고죄(不告罪)를 수사해야 한다며 임금에게 승낙을 청했다. 군례가 상왕을 험담할 때 맹손이 군례의 옷을 잡아당기며 말린 사실이 확인되었다며, 맹손이 아비의 죄를 알고도 관에 알리지 않은 죄를 캐겠다고 한 것인데, 승낙 대신 충보다 효가 먼저임을 상기시켰다. 


'군신 간의 의리도 중요하지만, 군신의 의리로 부자의 도리를 덮게 할 수는 없다.'고 말문을 열더니, 맹손이 제 아비의 옷을 잡아당기며 난언을 막으려고 한 것은 자식으로서 당연한 도리를 한 것이라 난언에 가담했다고 볼 수 없다고 일러주었다. 도원이 얼굴을 붉히며 물러가자 신하들을 둘러보며, 도원의 어리석음을 개탄하였다.     

도원은 법을 담당하는 관리로서, 맹손이 아비의 말을 들은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만 알고, 맹손이 제 아비를 사랑하는 효심은 헤아리지 못했으니, 어찌 법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느냐.(세종 3년 3월 15일).      


평안도 수천에 살던 최유원이라는 자가 제 아내를 때려죽이고는, 아내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 것처럼 나무에 매달아놓고서 관아에 신고하였다. 그의 아들이 아비의 거짓말을 고하여 형조에서 유원을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니, 공정한 증거를 찾아서 다시 국문하라고 명을 내렸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서로 숨겨주는 것이 도리라서, 아들의 증언으로 아비의 죄를 입증하는 것은 대의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세종 12년 12월 29일).  



3. 고의성 없는 위법 용서     


임금이 대궐 밖에 거둥하였는데 어떤 백성이 겁도 없이 어가 앞에 뛰어들었다. 우대언 정언이 법대로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니, 율문을 다시 검토하여 아뢰게 하였다. 어가 앞에 뛰어들면 안 되는 법이 있는 줄을 알고도 감히 뛰어들었다면 마땅히 법대로 다스려야 하겠지만, 무지한 사람이 어리둥절하여 갈 바를 모르고 뛰어든 것까지 법대로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세종 11년 3월 26일).      


경상도 전주에서 화살로 숯 더미를 쏘다가 실수로 여섯 살 된 아이를 죽인 사람이 체포되었다. 형조판서 정흠지가, 살인죄 대신 ‘미처 생각지 못하고 미처 보고 듣지 못하여 오살(誤殺)한 죄’를 적용하기를 청하니, 야외로 사냥을 나가서 화살로 새와 짐승을 쏘다가 실수로 사람을 맞혀도 살인죄를 적용하지 않는 예를 따르게 하였다(세종 13년 5월 11일).     


천문을 담당하던 서운관에서 설날에 일식(日食)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여, 임금이 세자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망궐 하례를 거행한 뒤에 근정전 밖 섬돌에서 구식(救食)하였다.  그런데 일식이 일어나지 아니하자, 임금이 서운관의 관원에게 종일토록 하늘을 관측하게 시키고, 북경을 다녀온 통사 이연에게 중국에서도 설날의 일식을 예견하였는지를 물었다. 이연이 정오쯤으로 예상하더라고 아뢰었다(세종 14년 1월 1일).                    

사흘 뒤에 사헌부에서 서운관의 관측이 정밀하지 못했다며 담당자를 처벌하기를 청했다. 임금이 듣고서, “분수(分數)가 매우 적어서 짙은 구름에 가려 보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 각 도에 공문을 내려 물어보게 하라.”고 지시하더니, “서운관 직원은 죄가 없다.” 하였다.

                    

중국에서도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을 것으로 예견하였다면 서운관에서 관측을 잘못한 것이 아니다. 전국의 각 도로부터 회보가 모두 도착하고 중국에 들어간 사신이 돌아온 뒤에 다시 의논해보자(세종 14년 1월 4일). 


강원도 평강으로 강무를 갔는데 임금의 막사 안으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지신사 안숭선 등이 깜짝 놀라서 화살을 쏜 자를 찾아서 엄히 다스리기를 청하니, 다투어 쏘는 사이에 잘못 쏴서 생긴 결과일 것이라며 승낙하지 않았다.      


숭선이 다시 훗날 같은 일이  재발할 가능성을 내세워 거듭 엄벌을 청하여, 조사를 허락하니 숭선이 화살을 잘못 쏜 자가 환관임 밝혀내서, 사건을 내시부로 넘기게 하였다. 그런데 숭선이 의금부의 논결을 기다린 뒤에 형을 정하기를 강력히 청하자 마지못해 승낙하였다(세종 14년 2월 23일).     


이틀 뒤에 짐승을 모는 병사가 산을 감시하는데 화살을 맞은 큰 멧돼지가 포위망을 뚫고 나와서 궁궐 소유의 말을 들이받아 죽게 하였다. 사복시 제조 최윤덕과 정연이 현장을 확인하고 나서, 주의를 다하지 않고 태만하여 말을 죽게 한 자들을 엄히 문책하기를 청하니, "뜻밖에 생긴 일로 죄를 묻기가 곤란할뿐더러, 멧돼지가 꼭 그 말에게로 달려와서 부딪힐 줄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느냐." 하고, 승낙하지 않았다(세종 14년 2월 25일).     

임금이 온천욕을 하기 위해, 왕비, 세자, 종친, 그리고 문무대신 50여 명을 거느리고 충청도 온수(온양)에 거둥하였다. 어가가 행궁에 도착하자 인근의 남녀노소가 구름처럼 모여들고 더벅머리 아이들과 백발의 노인들이 임금의 가마를 구경하였다. 그때에 어떤 사내가 겁도 없이 말을 타고 가마의 곁을 지나가 경호책임자가 임금에게 엄벌에 처하기를 청하니, "무지한 소인을 어찌 처벌하겠느냐." 하고, 따르지 않았다(세종 23년 3월 20일). 


재위 26년째 해 12월 다섯째 왕자인 광평대군 이여가 천연두를 앓다가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뒀다. 승정원과 사헌부에서 주치의에게 치료를 잘못한 죄를 묻기를 청했다. 임금이 듣고 나서 의원의 죄가 아니라 죽은 자의 운명이라며 따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임금이 사랑했던 첩이나 아들이 죽으면 주치의를 처벌한 많은 사례는 잘못한 것이라고 일러주었다(세종 26년 12월 7일, 11일). 


2년 남직 지나서 왕비(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대간이 어의로서 왕비를 치료한 첨지중추원사 노중례의 죄를 엄히 다스리기를 청했다. 왕비가 병석에서 신음할 때 의학서를 고루 찾아보지 않고 우물쭈물하면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임금이 분부한 뒤에야 비로소 약을 썼다며 사형에 처하기를 청한 것인데, 임금이 따르지 않고 전의감의 영사(令史)로 강등시켜 두건만 쓰고 근무하게 하였다(세종 28년 4월 2일, 12일, 29년 1월 3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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