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이 의금부에 명을 내려 살인범 체포자에 대한 포상기준을 3년 전에 도성에 큰 불이 났을 때의 수준으로 높이라고 하였다. 중추부 판사 허조가 사건의 심각성을 내세워 주상을 설득해 준 덕분이었다.
3년 전인 병오년(1426) 2월 임금이 대소신료를 거느리고 강원도 횡성으로 강무를 떠났다. 주상을 태운 거가가 횡성에 닿자마자 도성에 이틀 연달아 큰 불이 났다. 도성의 태반이 잿더미로 변하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강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보고를 접한 주상은 현지에서 피해복구와 이재민구호를 지시하고 황급히 거가를 되돌렸다. 대궐에 이르자마자 화재 전에 기승을 부리던 명화도적(明火盜賊)의 소행으로 여기고 방화범 체포령을 내렸다. 전국 곳곳에 나붙은 방문에 파격적인 현상금이 적혀있었다.
범인을 붙잡은 자가 천인(賤人)이면 신분을 양민으로 올려서 면포 2백 필을 주고, 양인이 붙잡았으면 관직에 등용하고 면포 2백 필을 주겠다.
낭보를 접한 무원은 그림을 그리는 도화원의 책임자를 찾아가 전국에 배포할 수배전단을 신속히 제작해 주기를 청했다.
범인이 잡힐 때가 되었기 때문인지, 하나의 호재가 생기니 또 다른 호재가 뒤따랐다.
바로 다음날 왜국에서 귀화하여 도성에 살고 있던 기무라(木村)가 예고도 없이 무원을 찾아왔다.
기무라는 태조 때 바라를 건너와 정부로부터 부사직(직책이 없는 종 5품 무관)을 받은 인물이다. 이후 30년 넘게 도성에 살면서 모국에서 사절단이나 상인들이 오면 각종 정보와 편의를 제공해 귀화한 왜인들 간에 마당발로 통했다.
-이춘발은 홍성부가 죽였을 겁니다.
무원은 기무라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홍성부는 죽은 이춘발과 같은 왜통사인데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 사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원은 기무라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미치광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친구이자 동료인 사람을 그처럼 잔인하게 죽일 수가 있단 말인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무원은 홍성부가 이춘발을 죽였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설령 농담이라도 살인용의자를 허위로 제보할 가능성도 희박하지 않은가?
그때까지 '설마' 쪽으로 기울어 있던 마음의 축이 '혹시' 쪽으로 넘어갔다.
-믿을 만한 증거가 있소?
무원은 궁금한 것들을 한꺼번에 묻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두 사람의 사이가 개와 원숭이 사이처럼 나빴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겠소.
'혹시' 쪽으로 기울었던 무원의 마음이 다시 '설마' 쪽으로 기울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같이 왜인들을 상대한 동료이자 친구가 아니오?
무원은 믿고 싶은 마음보다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는 표정으로 기무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좀 더 확실한 단서나 증거를 대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춘발이 왜관의 통역관 자리에 너무 오래 있으니까 성부가 원한을 품은 거지요.
무원은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판단을 내리기로 하였다.
-성부가 왜관의 통역관 자리를 차지하려고 친구를 죽였다고요?
-살아생전에 권력도 누리고 재물도 모으고 싶었겠지요. 권력과 재물에 눈이 멀면 탐욕에 불이 붙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기무라가 무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의 제보를 의심하는 무원이 답답하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무원은 자꾸만 커지려는 의심을 누르고 공범이 있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기무라의 말이 맞더라도 혼자서 살인을 하기는 힘들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성부가 범인이라면 혼자서 죽이지는 않았겠지요?
-공범이 있겠지요. 가까운 지인과 함께 죽이지 않았을까요?
무원도 기무라와 생각이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 여태 가만있다가 이제 와서 제보를 하는 것일까? 나중에 기회를 봐서 물어보려다가 뒤로 미룰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혹시 홍성부와 무슨 원수진 일이라도 있소?
무원은 질문을 던지고 나서 곁눈으로 기무라의 표정을 훑었다.
-20년도 넘게 서로 도우면서 지내온 사이에 원수라니요?
-그런데도 성부를 저승으로 보내려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본 거요.
-친구나 다름없는 춘발의 죽음이 개죽음이 되는 걸 모른 척할 수가 없었소.
-그렇다면 왜 진즉 말해주지 않았소?
무원은 눈동자가 안 보이게 실눈을 뜨고 기무라의 반응을 기다렸다.
-나 말고도 제보할 사람이 나올 줄 알았지요. 의금부의 역량을 믿었고요. 그런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고 의금부는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아서 생각을 바꿨지요.
귀화한 외국인의 대답 치고는 예의를 한참 벗어난 노골적 조롱이다.
어명을 수행하는 의금부도사로서 그냥 지나치기 힘든 도발적 비아냥이다.
무원은 주먹이 튀어나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사사로운 분풀이보다 사건해결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성부의 집은 어디지요?
-흥인문 바로 옆입니다. 흥인문을 등지고 서서 왼쪽을 바라보면 마당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 집입니다.
-중요한 정보를 알려줘서 고맙소. 더 물어볼 것이 생각나면 집으로 나장을 보내겠소.
기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원에게 예의를 표하고 대청으로 나갔다.
무원은 기무라를 돌려보내고 나서 나장 차덕수를 불렀다.
-지금 당장 흥인문으로 가게나. 가서 몸을 돌리고 왼쪽을 바라보면 마당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 집이 있을 것이네. 그 집 근처에 잠복하고 있다가 외출하는 남자가 있거든 몰래 뒤따라가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슨 짓을 하는지 확인해서 낱낱이 보고해 주게.
덕수는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민첩하면서 책임감까지 강해서 무원의 신뢰가 깊었다. 평소 무원이 무슨 일을 맡겨도 덕수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
해가 저물어 사방으로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성부의 집에서 중년의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사내는 잠시 사방을 살피더니 흥인문을 등지고 서대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덕수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사내의 뒤를 밟았다.
종묘 앞을 지날 때쯤 날이 어두워져 집집마다 등불이 켜졌다.
종각 부근에서 사내가 대문에 등불이 달린 주막으로 들어갔다.
-통사 나리 어서 오셔요. 호호호. 엊그제 같이 오셨던 분께서 먼저 와 기다리십니다. 초란아, 방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게냐. 어서 뛰어나와 통사 나리 모시지 않고.
덕수는 주막집 대문의 기둥에 등을 붙이고 안쪽의 동정을 살폈다.
방문을 여는 소리가 나고 여인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덕수는 성부가 방에 드는 것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가 주모에게 빈방을 청했다.
주모는 댓돌에 남자 신발 두 켤레와 여자 신발 두 켤레가 놓인 방과 바로 붙은 방을 정해줬다.
덕수는 댓돌에 신발을 벗어놓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리께서 사흘이 멀다 하고 저를 찾아주시니 오늘은 특별히 정성껏 모시겠사옵니다.
옆방에서 초란이가 사내에게 요염하게 아양 떠는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사이를 흙벽이 막고 있어도 작은 소리까지 다 들렸다.
-너의 자태가 날로 요염해지는데 내가 어찌 안 오고 배기겠느냐.
먼저 와있던 사내가 뒤에 도착한 사내를 초란에게 소개했다.
-머지않아 왜관의 통역관이 되실 분이다. 네 팔자가 피기를 원하면 오늘 밤 단단히 약조를 받아두어라.
-통사 나리 미리 축하드려요. 왜관의 통역관이 되시면 날마다 오시겠다고 약조해 주시와요.
-되기만 되면 날마다 오다 뿐이겠느냐. 그보다 더한 거라도 들어줄 테니 네 소원을 미리 생각해 두어라.
-아이고 좋아라. 그런데 언제 왜관의 통역관이 되시는 거예요?
-나라에서 하는 일을 낸들 어찌 알겠느냐. 하지만 자리가 비었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내는 겸손을 떠는 척하면서 자신의 앞날을 장담했다.
덕수가 옆방의 대화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데 밖에서 여인의 기척이 들렸다.
-들어오너라.
얼굴이 앳돼 보이는 기녀가 작은 소반에 주병과 술잔을 얹어가지고 들어왔다.
-화련이라 하옵니다. 저희 집에 처음 오신 것 같사옵니다.
-춘천을 다녀오는 길에 시장기가 돌아서 저녁을 먹으러 들어왔다. 해 지기 전에 도성에 닿으려고 땀을 많이 흘렸더니 술이 당기는구나. 한 잔 따르고 나가서 밥상을 들여오너라.
화련은 두 손으로 주병을 잡고 얌전하게 술잔을 채웠다.
술잔이 아직 차지 않았는데 덕수가 화련에게 물었다.
-옆방 손님들은 누구신데 저렇게 웃음이 넘치느냐?
-왜통사이신 홍성부 나리와 친구 분이신데 왜 웃으시는지는 모르옵니다.
-그렇구나. 점심 먹은 것이 다 내려갔으니 어서 나가서 저녁상을 가져오너라.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나가서 바로 밥상을 들여오겠습니다.
옆방에서 성부가 다른 기녀에게 친구를 치켜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네 이름이 난향이라고 하였더냐. 내가 왜관에 들어가고 나면 부자가 되실 분이니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다짐을 받아두거라.
-호호. 그렇지 않아도 초란이가 부러워서 배가 아팠사옵니다. 오늘 밤 성심껏 받들어 모시겠사옵니다.
-네 눈웃음을 보니까 부자가 되기 싫어도 꼭 부자가 되어야겠구나.
-부자도 큰 부자가 되셔야지요. 우선 제 술부터 한 잔 받으시와요.
난향이 술잔을 채우는 동안 사내가 성부에게 압박하듯 말했다.
-내 목숨을 걸고 한 일이란 걸 잊으면 안 되네.
-염려 말게. 내가 왜관에 들어가는 즉시 팔자를 바꿔주겠네.
난향이 주병을 방바닥에 내려놓으며 사내에게 물었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목숨까지 거셨어요?
-너 같이 천한 계집이 알 일이 아니다. 사내들은 때때로 친구를 위해 목숨도 걸기도 하느니라.
방문 밖에서 화련의 기척이 들렸다.
-들어오너라.
앉아서 시중을 들겠다고 하는 것을 좋게 타일러서 내보냈다.
옆방의 두 사내는 저녁을 먹으면서 세간의 자질구레한 소문들을 주고받았다.
사이사이 서로 술잔을 채워주며 두 기녀를 번갈아 희롱하였다.
덕수는 옆방의 대화에 신경을 쓰느라 밥을 한술도 못 떴다.
모두 남기면 주모가 의심할까 봐 밥을 통째로 국에 말아서 절반만 비우고 주막을 나왔다.
조금 기다렸다가 성부의 친구를 미행하려다 통금시간이 가까웠을 것 같아 집으로 향했다.
***
다음날 아침 무원이 출근하자마자 간밤에 주막에서 엿들은 말들을 상세히 고했다.
무원은 덕수의 보고를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귀담아들었다.
덕수가 보고를 마치자 무원이 몇 가지를 물었다. 즉석에서 덕수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지금 즉시 나장 다섯 명을 데리고 가서 성부를 포박해서 데려오라. 다락을 뒤져서 성부가 최근 삼 년 동안 작성한 일지(日誌)들을 모두 가져오라. 다락에 없으면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라.
나장들을 출발시킨 무원은 머릿속으로 신문계획을 짰다.
‘초장에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거나 책임을 떠넘겨서 고문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먼저 춘발을 죽인 이유와 공범을 추궁하자. 만약 시치미를 떼면 아침에 덕수가 보고한 대화를 들이대자. 그래도 잡아떼면 기녀들을 데려다 대질시키자. 만약···.’
궁리를 다 마치고 한참이 지났을 때 성부가 오라에 꽁꽁 묶여서 나장들에 이끌려 도착했다. 성부의 3년 치 일지도 함께 따라왔다.
무원은 성부를 옥방에 가두게 하고 성부의 일지들을 빠른 속도로 훑었다.
춘발의 일지만큼은 아니어도 적혀있는 기록마다 자세하고 꼼꼼했다.
내용을 한참 읽어 가는데 ‘기무라’라는 단어가 시야에 잡혔다.
동료 왜통사가 모친상을 당해 저녁에 명륜방으로 조문을 갔다. 먼저 와있던 기무라와 같은 밥상에서 저녁을 먹었다. 조문을 마치고 기무라와 같이 상갓집을 나왔다. 흥인문 앞까지 함께 걸으며 이춘발의 성품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춘발이 훈도방 개천교에서 괴한에게 피살되기 한 달 반쯤 전이다.
무원은 성부가 기무라와 같이 밤길을 걸으면서 서로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이 궁금했다. 특히 기무라가 성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꼭 알고 싶었다. 기무라가 평소 남의 험담을 자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무원은 퇴청 시간이 지나도록 걸상에 앉아서 성부를 신문할 계획을 세웠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나장들을 시켜서 옥방에 갇힌 성부를 데려오게 하였다.
신문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준비한 질문들을 혀 밑으로 모았다. 복병으로 숨겨두었다가 상대가 빈틈을 보이면 기습공격을 감행할 무적의 용사들이다. 상대방이 맹렬하게 덤비면 입술을 박차고 뛰어나가 백병전으로 적을 제압할 특공부대다.
-나리. 홍성부를 마당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집무실 밖에서 두우머리 나장의 굵은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무원의 무성한 턱수염이 가늘게 흔들렸다.
무원은 걸상에서 일어나 대청마루를 거쳐서 마당으로 갔다.
무원의 모습을 본 성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원은 독사눈을 뜨고 성부를 노려보며 미리 준비한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평소 기무라를 자주 만나는가?
-자주는 아니고 만나야 할 일이 생기면 만나는 사이입니다.
겉저고리 밖으로 나와 있는 성부의 목울대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기무라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언제인가
성부는 한 달쯤 전에 동료가 모친상을 당해 명륜방으로 문상을 갔다가 본 뒤로 못 봤다고 하였다.
-문상을 마친 뒤에 기무라와 바로 헤어졌는가?
-사는 동네가 같아서 흥인문까지 같이 걸었습니다.
-둘이 밤길을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가?
성부는 눈을 지그시 감고 기억을 더듬는 시늉을 하였다.
성부가 대답으로 내놓은 말은 무원이 짐작한 것과 비슷했다.
기무라는 춘발을 억지가 심하고 자기 의견만 내세우는 옹고집으로 폄훼하였다. 성부는 춘발에게 그런 면이 없지 않다고 호응했다. 기무라는 성부가 왜관의 통역사가 될 기회를 춘발이 막고 있다고 하였다. 성부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였다. 기무라는 혀를 끌끌 차면서 ‘참 미욱하고 노둔한 친구’라고 핀잔을 주었다.
무원은 기무라가 두 사람을 싸잡아서 깎아내린 것은 이간질의 전형이라고 판단했다. 틀림없이 그랬을 거라는 심증이 뇌에서 부글거려 혀를 입안에 묶어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무라의 말에 열불이 나서 춘발을 죽였는가?
성부는 대답 대신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무원을 빤히 쳐다봤다. 무원은 성부가 대경실색해서 얼굴색이 하얘지든지, 말을 더듬든지, 횡설수설할 줄 알았다.
무원은 성부가 범행이 탄로 날 경우에 대비해 미리 단단히 작전을 짜뒀다고 짐작했다.
무원은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무원의 반응을 기다렸다.
무원이 예상한 대로 성부는 살인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다. 성부의 시선이 점차 밤중에 사냥을 나온 야행성 동물의 눈빛을 닮아갔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를 살인범으로 모시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저에게 누명을 씌우지 마시고 증거를 대보십시오. 제가 춘발을 죽였다면 목격자나 물증 이 있을 게 아닙니까?
성부의 강한 부인은 잘못을 숨기려다 덜미를 잡힌 용의자들이 범행을 실토하기 전에 흔히 써먹는 수법이다. 하지만 서두르면 되치기를 당할 수 있으니 유력한 단서나 증거가 드러날 때까지 속아주는 척하자.
-나도 그대가 그 정도로 오랜 친구를 죽일 정도로 파렴치한 인간일 거라고는 생각지 않네. 살인범을 잡으려면 피살자와 가까웠던 사람들부터 점검해야 해서 물어본 것이니 고깝게 생각지 말게.
-일전에 개천교에서 허망하게 죽은 이춘발과 사이가 각별했다던데?
무원은 성부가 부담 없이 사실대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직전까지 어색하게 눈을 부라리며 무원을 노려보던 성부의 표정에 안도하는 기색이 번졌다.
-태종께서 보위에 오르시기 직전인 경진년(1400) 시월에 사역원(司譯院)이 왜어 통역사를 뽑는 시험에 같이 합격했습니다.
사역원은 한어·여진어·몽골어·왜어 등을 가르치면서 외국어 통역과 번역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그곳에서 연수를 받고 통역사 자격을 얻으면 전공한 언어에 따라 외교무대에서 활약할 기회가 주어졌다.
-왜관의 통역관 자리를 노리는 이가 많다던데···.
무원은 기무라가 들려준 이야기를 슬쩍 들춰서 성부의 반응을 떠봤다.
-권세와 재물을 탐내는 자들은 다 그 자리를 가고 싶어 하지요.
-그대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소?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힘쓰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사방에 인재가 널렸는데 저 같은 사람이 낙점을 받겠습니까?
무원은 상대가 사정권에 들어왔다고 판단했다.
-순순히 범행을 털어놓겠는가? 아니면 매질을 당하고 실토하겠는가? 선택은 그대의 몫이네. 계속 부인하면 사실을 말할 때까지 고통을 당할 것이네.
무원의 목소리에서 바위 같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무원의 두 눈이 먹이를 뒤쫓는 맹수의 눈처럼 변했다.
-앞에서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무엇을 털어놓으라는 말씀입니까. 도사께서 착각을 일으키신 게 아닙니까?
잡아떼는 성부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양쪽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시선이 허공을 헤맸다. 매질을 당할 생각에 허세가 꺾였다는 증거다.
-매질을 당하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경고해 두겠네.
성부가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뭔가를 깊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성부는 왜통사 일을 하는 동안 의금부의 고문에 대해 수없이 들었다. 도사들 중에서도 무원의 고문이 가장 악명이 높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했다.
자신이 체포되기 전에 무원이 허위 제보에 속아서 순박한 무당 가족을 잔인하게 고문하였다가 무당의 장남이 신문고를 치는 바람에 대궐에 불려 가 혼쭐이 났다는 풍문도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뒤로 무원이 다시는 고문을 안 하기로 결심한 사실은 알지 못했다. 무원이 생각을 바꾸고 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