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봉합

10. 고군분투

by 조병인

무원의 강렬한 눈빛이 성부에게 신속한 자백을 재촉했다.

성부의 양쪽 눈에서 부엉이의 발톱에 낚인 들쥐의 절망한 눈빛이 새 나왔다.

잠시 뒤에 성부의 혀가 무릎을 꿇었다.

-춘발이 제 앞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원은 불교에서 삼독(三毒)으로 꼽는 탐욕·분노·우매의 결정판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자리가 욕심났기로서니 어떻게 삼십 년 지기를 죽일 생각을 하였을까? 인간은 본래부터 악(惡)한 성품을 타고난다는 순자의 말이 옳은 것인가?


무원은 기가 막혀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래서 누구와 같이 죽였는가?

-저는 현장에 가지 않았습니다.


공범을 묻는 질문에 책임을 줄이려는 대답을 내놓다니. 틀림없이 계산된 동문서답이다. 하지만 법은 다른 사람에게 범행을 시키거나 범행을 부추긴 자도 범행을 실행한 자와 똑같이 처벌하게 되어 있다.


-현장에 가지 않고 사람을 죽였다? 무슨 요술이라도 부렸단 말인가?

-제 친구인 김생언이 자기 친구 두 명과 같이 죽였습니다.

무원은 성부가 겁에 질려 있을 동안 속도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밤에 주막에서 만난 자가 김생언인가?

성부가 갑자기 천둥소리에 놀란 토끼처럼 안절부절못하였다.

무원의 칼날 같은 눈빛이 성부의 눈동자에 꽂혔다.

성부는 잠결에 잠꼬대를 하듯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무원은 기무라의 제보에 대해 품었던 의심을 거뒀다.


-생언에게 어떤 대가를 약속하였느냐?

무원의 질문이 반말로 바뀌었다. 신문을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뜻이다.

-대가를 약속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생언이 아무 조건 없이 네 부탁을 들어줬다는 것이냐?

-생언도 춘발을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무원은 꼼꼼히 짚어봐야 할 것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생언은 왜 춘발을 죽이고 싶어 하였느냐?

-몰래 밀무역을 하다 춘발에게 덜미를 잡혔습니다.

-생언이 몰래 사고 판 물품이 무엇이냐?

성부는 생언이 왜상에게 백은과 동전을 주고 칼 세 자루를 샀다고 하였다.

무원은 생언이 밀무역을 하다 이춘발에게 들킨 사실을 알게 된 경위를 물었다.

성부는 생언이 자기에게 자초지종을 밝히고 조언을 구했다고 하였다.

-평소 둘이 친하게 지냈다는 뜻이구나.

-생언이 왜상과 만날 때 제가 통역을 해줬습니다.

무원은 겁에 질린 성부의 표정에서 강렬한 생존본능을 읽었다.

-그 핑계로 생언을 부추겨서 춘발을 죽이게 한 것이냐?

-제가 생언을 부추긴 게 아니고 우연히 둘이 동시에 춘발이 없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원은 성부가 자신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안간힘을 쓴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먼저 춘발을 죽이자고 한쪽이 있을 게 아니냐?

-처음에 제가 지나가는 말로 ‘춘발이 때문에 앞날이 막혔다.’고 했습니다. 생언이 듣고서 ‘춘발을 없애면 되지 않느냐?’라고 해서 제가 농담으로 ‘네가 대신 죽여주라.’고 했습니다.

무원은 사건의 주범과 공범을 가릴 필요를 느꼈다. 같이 공모하였어도 범행에 가담한 정도에 따라 죗값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


무원은 성부에게 물어볼 질문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 왜관에서 싸움이 났다고 속여서 춘발이 왜관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자고 제안한 사람은 누구인가?

둘째. 왜 하필 삼월 이십삼 일로 날짜를 잡았는가?

셋째. 왜 하필 개천교를 범행장소로 택했는가?

성부는 밤중에 춘발을 밖으로 유인하자고 한 사람은 자기라고 하였다.

날짜와 장소에 대한 진술은 무원이 추측한 대로였다.

-달빛이 절반만 비치는 하현달이 뜨는 밤을 골랐습니다. 다리 위에서 공격하면 도망을 못 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원은 ‘기필코 사건의 전모를 낱낱이 밝혀서 주범이든 공범이든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주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김생언과 같이 왜통사를 죽인 두 놈의 이름과 사는 곳을 대라.

-저는 모릅니다. 생언이 이름도 성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생언의 집이 어디냐?

-서대문 밖 마포 나루 근처입니다.

무원은 나장 다섯 명에게 성부와 같이 생언의 집으로 가서 생언을 잡아오게 하였다.

다른 나장 두 명을 시켜서 죽은 이춘발의 집에 가서 범행을 목격한 개동을 데려다 나장복을 입혀놓게 하였다.


정오가 한참 지나서 생언이 성부와 함께 나장들에 이끌려 도착했다.

무원은 본능적으로 빠르게 생언의 몸을 훑었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으나 어깨가 단단해 보였다.

무원은 생언을 데려온 나장들에게 점심부터 먹이기로 하였다.

무원은 나장들에게 생언의 결박을 풀어주고 식당에 데려가 밥을 먹이게 하였다. 나장 한 명을 가까이 불러서 생언이 어느 손으로 숟가락을 잡는지 보라고 시켰다. 검시 때 몽둥이로 왜통사의 머리를 가격한 자는 왼손잡이일 것으로 추정했기 때문이다.


생언에게 점심을 먹이고 돌아온 나장은 생언이 왼손잡이라고 하였다. 숟가락으로 밥과 국을 뜰 때도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을 때도 왼손을 쓰더라고 하였다.


생언이 개천교에서 몽둥이로 왜통사 이춘발의 머리를 가격한 것이 틀림없어.

심증을 굳힌 무원은 점심을 먹여서 옥방에 가둔 생원을 데려오게 하였다

-너와 함께 왜통사를 죽인 자들의 이름을 대라.

-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무엇 때문에 왜통사를 죽입니까.

-왜 죽였는지는 네가 알 일이지 내가 어찌 알겠느냐?

-왜통사를 죽인 일이 없는데 어떻게 죽인 이유를 댑니까?

-네가 잡아뗀다고 너의 악행이 덮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원은 신문을 멈추고 생언을 잠시 옥방에 가두게 하였다.

-들어보니까 어떻더냐. 생언의 음성이 그날 밤에 대문 밖에서 왜관 사령 행세를 한 자의 음성과 같더냐?

무원은 나장 복장을 하고 있던 개동을 가까이 불러서 물어보았다.

-같은 것도 같고 다른 것도 같고···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개동은 큰 잘못을 저지르고 붙잡혀온 사람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흐리멍덩한 대답이 어디 있느냐?

-개 짖는 소리도 낮에 듣는 것과 밤에 듣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까.

-개나 사람이나 목청을 높이면 굵게 들리고 목청을 낮추면 가늘게 들리는 것이지 무슨 밤낮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냐? 네가 그렇게 멍청한 줄을 줄 모르고 너에게 기대를 건 내가 생각이 짧았다. 네 옷으로 갈아입고 네 주인에게 돌아가라.


***

-왜상으로부터 물품을 밀무역한 적이 있느냐?

무원은 옥방에 가두게 한 생언을 다시 데려다가 신문을 재개했다.

-아는 왜인도 없고 왜말도 모르는 제가 어떻게 밀무역를 합니까?

-홍성부에게 통역을 부탁해서 왜상과 밀무역을 하지 않았느냐?

생언이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무원을 빤히 쳐다봤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딱 한 번 백은과 동전을 주고 칼 세 자루를 산 적이 있었네요.

생언은 방금 전에 자신이 한 말을 천연덕스럽게 뒤집었다.

-밀무역을 하다 이춘발에게 들킨 것이 언제였느냐?

무원은 개의치 않고 단도직입으로 재차 물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습니다. 사자마자 곧바로 팔아서 다른 사람이 알 틈이 없었습니다.

무원은 생언의 대답에 교활한 데가 있다고 느꼈다.

-죽은 자는 말을 못 한다고 거짓이 통할 줄 아느냐?

생언은 자기가 이춘발을 죽였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하였다.

-간밤에 무슨 일로 성부와 만났던 것이냐?

생언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번졌다.

-···?

생언은 주먹다짐을 하다 급소를 얻어맞은 것처럼 잠시 숨을 멈췄다.

-나는 너희가 기녀들에게 한 말까지 다 알고 있다.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 같이 저녁을 먹은 것이 전부입니다.

-성부에게 ‘목숨 걸고 한 일이란 걸 잊지 마라’고 한 말은 무슨 뜻이었느냐?

-성부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원은 상대가 잔머리를 굴릴 틈을 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물었다.

-이춘발이 피살된 삼월 이십삼 일 밤에 어디서 무엇을 하였느냐?

-집에서 잤습니다. 해가 지기 무섭게 온 백성의 발목이 꽁꽁 묶이는데 어디를 가서 무슨 짓을 합니까?


생언의 대답은 옳다. 밤에 종루의 종이 스물여덟 번 울리면 통금이 시작되어 누구도 외출을 할 수가 없다. 집 밖으로 나가려면 다음날 새벽에 종루의 종이 서른세 번 울릴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무원은 제 집으로 돌려보낸 개동을 떠올렸다.

-네 음성이 통사가 죽던 날 통사 집에 가서 왜관 사령 행세를 한 자의 음성과 같다고 증언한 사람이 있다.

무원은 개동이 마치 생언을 용의자로 지목한 것처럼 압박을 가했다.

-제가 유령으로 보시입니까? 밤만 되면 순관들이 도처에 깔리는데 어떻게 몰래 통사의 집을 가서 사령 행세를 합니까?

무원은 국가가 정한 통금시간을 확실한 방패로 활용하는 생언의 간악함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무원에게는 그럴 때 써먹는 필살기가 있었다. 율학생도 시절 습득한 무기다.


눈은 마음의 등불이다.

혀는 상대방을 속일 수 있어도 눈은 상대를 못 속인다.

무원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생언의 눈동자에 자신의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생언의 눈빛이 아주 잠깐 좌우로 흔들렸다.

찰나처럼 짧은 순간에 양쪽 눈동자가 수축했다가 커졌다.

무원은 열 손가락을 안으로 오므렸다가 천천히 펼쳤다.

무원의 심장에서 사과만 한 불덩이가 발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불덩이가 얼굴 양쪽의 귀와 눈 사이의 관자놀이를 지나 정수리에 닿았다.

-말로는 안 되겠다. 나장들은 난장(亂杖)을 가할 준비를 갖추라.

난장은 여러 명의 나장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마구잡이로 매질을 가하는 고문 방법이다. 의금부에 잡혀가본 사람은 ‘난장’이라는 말만 들어도 공포에 질렸다. 형조나 사헌부 같은 사법기관은 난장을 쓰지 않았다. 오직 의금부만 용의자를 신문할 때 난장을 썼다.

-매질을 당하고 실토할 것인지 순순히 실토할 것인지 선택하라.

무원은 실제로 난장을 칠 생각이 없었다. 단지 생언이 겁을 집어먹고 범행을 털어놓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효과가 있었다.


생언이 목소리를 가볍게 떨면서 용의자 두 명을 지목했다.

-제 친구인 간충이 자기 친구와 같이 왜통사를 죽였습니다.

무원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생언이 끝까지 버틸 마음을 먹었다면 고문을 절대 안 하기로 한 다짐을 어겼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무원은 생언을 똑바로 쳐다보며 생언의 양심을 압박하였다.

-성부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만 살겠다고 공범에게 책임을 미루다니. 비열한 놈이다.


무원은 과거에 야비하게 책임을 떠넘기는 자들을 독하게 고문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누적된 분노가 화재현장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어금니를 악물고 분노를 구슬렸다.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지름길로 가시지요.

우두머리 나장이 가까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고문을 건의했다.

-감정에 휘둘리면 일을 그르칠 수 있네.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언을 앞세우고 가서 간충을 잡아오게.

무원은 나장들이 모르게 깊은숨을 내뿜었다. 고문의 유혹을 이겨낸 자신의 인내심을 가만히 칭찬하였다.

***

나장들에 이끌려서 의금부에 도착한 간충은 걸을 때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다리를 다친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그런 것 같았다.

첫인상이 소처럼 순하면서 어리숙해 보였다. 귀도, 눈도, 입도, 코도 조금씩 헐겁고 느슨해 보였다.

무원은 생언을 옥방에 가두게 시키고 간충에게 타이르듯 물었다.

-생언으로부터 무엇을 받고 왜통사 살인에 가담하였느냐?

첫인상 그대로 간충은 알고 있는 것을 숨길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자기를 도와주면 부자가 되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너를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더냐?

-왜관에 술과 안주를 납품하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왜관에 술과 안주를 납품하게 해 주었느냐?

-홍성부가 왜관의 통역관이 되면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무원은 할 말을 잃고 간충을 노려봤다.


고작 술장사가 하고 싶어 외상으로 살인을 도와주다니···.


손바닥으로 힘껏 뺨을 갈기고 싶었지만 감정에 휘둘려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생언과 함께 통사를 죽인 과정을 하나도 빼지 말고 말해보아라.

무원은 억지로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간충의 눈을 바라보았다.

간충은 범행 당시 자신이 담당한 역할과 현장에서 목격한 일들을 순서대로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간충의 증언에 따르면, 삼월 이십삼 일 밤 통금시간에 세 사람은 순관들의 눈을 피해 훈도방으로 갔다.

득시는 개천교 근처에 숨어있고 간충과 생언은 광통방에 있는 이춘발의 집으로 갔다.

그다음 이야기는 그 집의 하인인 개동의 진술과 대부분 일치했다.

처음에 생언이 대문을 거세게 두들기며 통사의 이름을 불렀다.

제 방에서 곤히 자고 있던 하인이 잠에서 깨어나 마당으로 나왔다.

생언이 왜관 사령을 가장하고 왜관에서 패싸움이 났으니 속히 통사를 깨워서 왜관으로 가게 하라고 시켰다.

그다음부터는 개동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인에게 주인을 깨우게 한 두 사람은 자리를 뜨지 않고 집안의 동정을 살폈다. 하인이 마구간으로 가서 말을 꺼내오는 것을 확인하고 득시가 숨어있는 개천교로 갔다.

생언은 다리 근처 민가의 나무울타리에서 굵은 작대기를 뽑아가지고 득시와 함께 통사를 기다렸다.

간충은 근처에 숨어서 망을 봤다.

마침내 통사가 말을 타고 하인과 함께 개천교에 이르렀다.

득시가 순관을 가장해 길을 막았다.

통금위반을 빌미로 하마(下馬)를 요구했다.

통사가 시비를 벌이다 마침내 말에서 내리려고 몸을 옆으로 틀었다.

생언이 가까이 다가가 몽둥이로 통사의 머리를 내리쳤다.

통사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 위에 고꾸라졌다.

둘이 동시에 달려들어 춘발의 배와 가슴을 짓밟았다. 주먹과 발길로 허벅지와 정강이를 닥치는 대로 때리고 걷어찼다.

생언이 통사의 죽음을 확인하고 득시와 함께 왜관 쪽으로 달아났다. 간충은 은신처에 남아 있다가 통금이 풀린 뒤에 제 집으로 갔다.

***

무원은 생언과 간충을 개천교로 데려갔다.

간충에게 의금부에서 말한 과정을 행동으로 보여 보게 시켰다.

중요한 대목들이 개동의 진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간충이 연기를 펼칠 때마다 생언은 도리질을 반복했다.

무원의 분통이 요동을 쳤다. 얼굴 양쪽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불거졌다.

무원은 주상으로부터 어필로 쓰인 여덟 가지 옥송수칙을 받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날 감격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과오를 반성했던 기억이 생각났다.

무원은 나장들을 시켜서 생언을 옥방에 가두게 하고 의정부로 갔다. 의금부 도제조인 찬성 권진에게 수사의 진척을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홍성부와 간충은 김생언이 이득시와 함께 춘발을 죽였다고 하는데 생언은 밀무역 혐의만 시인합니다.

무원은 생언의 간교한 언동을 사실대로 고했다.

-매질을 독하게 가해도 털어놓지 않더냐?

-매는 한 대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무어라! 매를 한 대도 안 때렸다? 살인을 자백하면 죽을 것을 알면서 순순히 실토할 자가 있을 줄 알았더냐?

-혹여 생언이 죽거나 불구가 되면 주상의 어진정치에 누가 될까 봐 처음부터 매를 가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개탄과 멸시가 진흙처럼 뒤섞인 격노가 무원의 귓전을 갈겼다.

-주상의 어진정치에 누가 될까 봐? 오호라, 이제 보니 의금부에 성인군자가 계셨구나. 매질을 당하지 않고도 잘못을 뉘우치고 범행을 털어놓는 자를 한 명이라도 본 적이 있느냐. 당장 돌아가 매질로 자백을 받아내라.

무원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몸속 어디선가 스멀스멀 반감이 자랐다. 참자! 나의 적은 도제조가 아니라 김생언이다.

무원은 자신의 무능을 자책하며 간신히 평상심을 회복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제조가 의금부 제조들인 호조 판서와 형조 판서를 설득해 생언의 살인혐의를 덮으려 하였다. 생언에게 밀무역 혐의만 적용해 생언을 사형에 처하려고 한 것이다.

도제는 두 제조를 설득한 뒤에 함께 대궐에 들어가 주상을 만났다.

-김생언이 밀무역만 시인하고 살인은 완강하게 부인한다 하옵니다. 살인혐의는 캐지 말고 밀무역에 대해서만 죄를 가하면 어떻겠습니까? 죽일 수만 있다면 죄목이야 상관없지 않습니까?

-도제조는 지금 그걸 묘안이라고 내놓는 것인가? 그럴 바에는 법이 왜 필요하고 임금은 왜 필요한가?

주상은 세 사람을 싸잡아 질타했다.

도제조도 제조들도 입을 떼지 못하고 몸을 떨면서 전전긍긍하였다.

-그대들은 김생언이 왜 밀무역만 시인한다고 생각하시오?

주상이 흥분된 어조로 세 사람에게 물었다.

-사면을 만나서 목숨을 건지겠다는 속셈이 아니겠습니까?

도제조인 의정부 찬성 권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보다 훨씬 이상이오. 놈은 그대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소.

-소신이 어리석은 탓이옵니다.

의정부 찬성 권진이 다시 한번 반성하는 발언을 내놨다.

-놈이 그만큼 간교하다는 말이오. 필시 살인은 유족이 있어 사면이 어렵고 밀무역은 피해자가 없어 사면이 쉬운 사정을 알고서 짜낸 계략일 것이오.

권진은 주상의 말이 면박으로 들렸다.

자신보다 품계가 낮은 두 제조 앞에서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되었다.

이 참에 도제조를 그만두자.

권진은 주상에게 의금부 도제조와 제조들을 사헌부와 사간원의 수장들로 바꿔주기를 청했다. 나이가 일흔을 넘어 겸직이 버겁다고 하였다.

주상도 속으로 경질을 생각하고 있었던지 두말없이 도제조를 판부사 허조로 바꾸고 사헌부의 대사헌과 사간원의 좌사간을 제조로 임명했다.


***

무원은 새로 바뀐 도제조와 두 제조에게 희망을 걸었다.

주상 앞에서 철저한 준법을 다짐한 초심을 떠올리며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급히 가려다 넘어지면 목적지에 닿기 전에 기운이 다할 수 있다.

생언을 옥방에서 끌어내 원점에서부터 다시 신문을 시작하자


-춘발이 너의 밀무역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

-발각된 적이 없다는데 왜 자꾸 같은 질문을 하십니까?

-네가 거짓말을 반복해서 내가 자꾸 묻는 것인 줄을 몰라서 하는 소리냐? 성부가 내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맹세코 저는 외통사에게 밀무역을 들킨 적이 없습니다. 성부가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생언은 말이 청산유수고 임기응변이 능했다. 며칠에 걸쳐서 신문을 계속해도 동요하는 기미가 조금도 없었다.

유월이 되어 날이 더워지니 심신에 피로가 쌓였다. 나장들도 체력이 소진되어 사기가 떨어지고 의욕을 잃었다.

무원은 말없이 결과를 기다리는 주상이 두려웠다.

설상가상으로 득시가 외국으로 갔다는 풍문이 들렸다. 서해의 포구에서 명나라로 들어가는 배를 탔다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했다.

무원은 소문을 믿지 않았다. 대신 잠적한 이득시나 그 부하들이 수사에 혼선을 주려고 퍼뜨린 유언비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나는 영토 안에 발이 묶였는데 범인은 새처럼 국경을 넘어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원은 편치 않은 심기를 달래며 이득시가 숨어있었던 남산을 올려다보았다. 꼭대기에서는 도성의 구석구석이 한눈에 보일 것을 생각하니 산 전체가 목격자의 얼굴로 보였다.


저 산은 홍성부와 김생언이 만나서 이춘발을 죽이기로 공모하는 현장도 지켜봤겠지. 김생언이 이득시와 간충을 언제 어디서 만나서 어떤 계략을 꾸몄는지, 춘발을 죽이고 남산에 숨었던 이득시가 어디로 튀었는지 등등 내가 알고자 하는 모든 것을 소상히 알고 있겠지.


소나무 숲 사이사이에 대형 버섯처럼 듬성듬성 박혀있는 바위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자기에게 물어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남산과 대화를 나눠볼 방법이 없을까?

무원은 다양한 귀신을 섬기며 굿도 하고 점도 치는 무당의 신통력을 떠올렸다.

곧바로 나장 덕수를 주련의 집에 보내 득시의 행방을 물어보게 하였다.

-득시는 큰 물이 있는 쪽으로 가서 우거진 숲에 숨었을 거라고 합니다.

오래지 않아서 덕수가 돌아와 주련의 점괘를 보고했다.


큰 물이라면 강이나 호수를 말한 것 같은데 나라 안에 강과 호수가 어디 한둘인가? 만약 바다를 말한 거라면 북쪽만 빼고 모두 바다가 있지 않는가? 또 우거진 숲이 지천에 널렸는데 어느 고을의 숲으로 들어갔다는 말인가?

무원은 나라에서 허황된 미신으로 규정한 무속에 기대서 사건을 해결하려 한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금부도사가 답답하다는 핑계로 무당에 의지해 살인범을 잡으려 하다니. 만약 주상의 귀에 들어간다면 얼마나 실망이 크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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