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의 기준은 몇 가지일까?
우리 집은 요즘 핫하다는 ‘붕세권'이다. 추운 겨울이 왔다는 신호 붕어빵 파는 가게가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있다. 추운 날씨에 붕어빵을 굽고 계신 아저씨를 보고 있으니 이 과장 소식이 떠올랐다.
한 과장이 출근을 하자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든다. 이 과장이 말도 없이 갑자기 회사를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입사 이후 처음이었다. ‘성실’이라는 단어의 표본과도 같았던 친구가 대체 무슨 일인가? 당연히 시선은 이 과장과 입사 동기 사이로 친하게 지내던 한 과장에게 쏠렸다.
“무슨 일 이래?”
“저도 잘.. 확인해보겠습니다”
한 과장의 표정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몇 달 전 이 과장이 파트장 자리에 오르면서 둘 사이가 예전만 못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다. 주위의 기대하는 눈빛에 떠밀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 과장이 이 과장에게 전화를 하였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톡이라도 남겨놓자는 생각에 메시지를 보내려는 찰나에 이 과장으로부터 한 장의 사진이 포함된 메시지가 왔다.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표정이 밝고 인상이 좋은 편이던 평소 이 과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얼굴 반쪽이 흉측하게 굳어버려 입을 열고 닫는 것도 불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말을 하기가 좀 어려워서 메시지를 보낸다는 이 과장의 설명이 수긍이 되었다. 한 과장을 향해 안테나를 높게 세우고 있던 주위에 사진을 보여주자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신이 나서 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과장은 뛰어나고 성실한 엔지니어였다. 퇴근 후 집에 가서도 연구과제에 몰입하기 일쑤였고, 그런 일들을 정말 신이 나서 하는 게 느껴졌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현해낼 때는 아이처럼 기뻐하기도 하였다. 당연히 회사에서의 평가도 좋았다. 한 과장은 그가 동기지만 존경스럽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그와 자신이 같은 층에 있을 때까지만 이었다. 그가 파트장으로 승진을 하여 한 과장과 레벨이 달라지자 불편한 게 사실이었다. 한 과장은 새로운 자리에 적응하느라 힘들어하는 이 과장의 고충을 본체만체하였다는 사실이 떠올라 미안해졌다.
파트장의 자리는 보고자료 작성과 발표가 업무의 8할이다. 이런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이 과장은 꽤 힘들어했다. 특유의 성실함으로 극복해보고자 회사 앞으로 이사까지 왔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허우적거리는 것만 같이 계속 파도에 밀려갔다. 그를 파트장 자리에 앉힌 그룹장은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이 과장 때문에 속을 태웠고, 그 마음이 때로는 폭언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는 비단 이과 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엔지니어로 훌륭한 역량을 보이던 사람들이 진급 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람마다 모두 자질이 다를 터인데 진급을 하게 되면 모두 관리자형 인재로 키우려는 회사의 욕심에 연구개발형 인재들은 꽃을 피우지 못하고 천덕꾸러기로 전락한다. 연차가 올라가고 나이를 먹어도 평범한 엔지니어로 역량을 발휘하는 문화가 우리에게는 없다. 미국이나 일본의 업체들과 회의를 할 때면 머리가 희끗희끗한 50~60대 엔지니어들을 흔하게 만나볼 수 있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우리의 실무 엔지니어들은 언제나 2~30대이다.
우리 사회는 성공의 기준이 다양하지 못하다.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국영수 과목의 문제를 잘 풀어 높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소위 '사'자로 끝난다는 전문직이나 대기업 타이틀이 있어야 하고, 조직에서 파트장, 그룹장, 나아가 임원 등의 계급장을 따야 하고, 멋진 집과 차를 소유하고 돈이 많아야 한다. 인생의 매 단계마다 이렇듯 획일화된 성공의 기준을 통과해야 제대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나 사람이 타고난 기질이 모두 다르고, 가진 재능이 모두 다른데, 성공의 기준이 이렇게 한 가지로 정해진다는 게 말이 되나? 사람의 기질과 재능을 무시하고 정해진 성공의 틀에 끼워 맞추려다 보니 똑같은 모양의 붕어빵만 계속해서 만들어낼 뿐이다. 그들이 가졌던 각양각색의 기질들은 붕어빵 틀에 들어가지 못하고 흘러나온 반죽처럼 사그라지고 만다.
울타리 안에 있을 때 울타리 밖의 세상을 알기 어렵다. 붕어빵 말고 국화빵도 있고, 꽃게빵도 있고, 굳이 틀 안에 부어지지 않고 자유로운 모양의 빵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는 다시 붕어빵 틀 안으로 돌아가겠지만, 적어도 다양한 모양의 다른 빵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이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의 기질과 재능을 발현하기에 틀이 맞지 않는다 생각하면 다른 틀을 찾는 여정을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어느 틀 안에 있는가? 지금 편안함을 느끼고 있나? 억지로 내 몸을 구겨 넣어 틀 안에 맞추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억지로 몸을 끼워 넣은 그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 두려운 분들이 있다면 용기 있게 나서서 실패하는 것이 겁쟁이 구경꾼이 되는 것보다 낫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조언을 전하고 싶다.
붕어빵 말고 국화빵이나 꽃게빵은 어떤가? 혹은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새로운 빵을 만들어보는 건 어떤가? 성공의 기준이 한 가지 일리 없다는 것을 잊지 않는 그대라면 겁쟁이 구경꾼으로 남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