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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Aug 13. 2019

마음도 눈처럼 감았다 떴다 할 수 있다면

 _테드 창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

갸웃했다. 처음 읽었을 때만 해도 부정적이었다. 두 번, 세 번 읽고 나서는 설득당했다. 칼리 키자.



책은 다큐멘터리 형식이다. 칼리라는 기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한다. 전문가도 있고, 칼리를 꼈던 학생, 끼지 않았던 학생, 그 학부모, 칼리를 지지하는 운동 단체와 반대하는 단체. 그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사례는 다 있다고 보면 된다.


칼리는 인간의 외모에 대해 미추 개념을 멈추는 기능이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쁘다고 감동하는 일도 없고, 추하다고 멸시하는 마음도 없다.


이 상태는 통각적 실인증이라기보다는 연상적 실인증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조치는 개인의 시각에는 간섭하지 않고,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인식하는 일에 간섭할 뿐입니다. 칼리아그노시아 조치를 받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얼굴을 완벽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뾰족한 턱과 뒤로 들어간 턱, 곧은 코와 비뚤어진 코, 매끄러운 피부와 티가 많은 피부를 구분할 수 있는 겁니다. 단지 이런 차이들에 대해 아무런 심미적 반응도 경험하지 않을 뿐입니다.
 _테드 창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


칼리를 켜면, 남들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게 된다. 스스로의 외모에도 필요 이상의 관심을 쏟지 않는다. 내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칼리를 켜면, 더 성숙한 사람이 된다.


세이브룩에는 골암이나 화상, 선천적 불구 등의 이유로 얼굴이 기형인 학생들의 수가 일반 학교의 평균치보다 더 높습니다. 그런 자식들을 둔 부모들이 다른 아이들한테 따돌림을 받는 일이 없도록 이곳으로 전학을 오는 겁니다. 효과도 있어서, 제가 처음에 가본 교실에서는 열두어 살 먹은 학생들이 반장을 뽑고 있었는데, 반장으로 뽑힌 아이는 얼굴 반쪽에 화상 흉터가 있는 여학생이었습니다. 그 여학생의 행동거지는 보기에도 정말 편하고 자연스러웠고,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도 좋았습니다. 다른 학교였다면 아마 바로 그 아이들한테 따돌림을 당했겠죠. 그때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런 환경에서 내 딸을 키우고 싶다고.
 _테드 창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걸 성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전문가 시스템이 당신을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일 뿐입니다. 성숙함이란, 차이를 눈으로 보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테크놀로지에 의한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_테드 창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


처음에는 아주 순진한 시도라고 생각했다. 성형수술과 별다른 차이를 찾지 못했다. 외면의 아름다움을 위해 의학기술을 사용하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위해 칼리를 사용한다. 그러면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있으면 또 수정할 것인가? 남보다 떨어지는 부분이 보인다면 추가할 것인가? 삶은 고통과 고난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대부분을 없애버린다면 나머지는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괴테에 의하면 삶은 아름다움조차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

어느날 책을 읽다가 이 한마디를 읽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아리고 멍해졌습니다. 더 이상 계속해서 책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 컸습니다. 이 말을 누가 한 말이라는 것은(문호 괴테가 한 말입니다만)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모든 색체가 빛의 고통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빛에게 고통이 있다면 바로 어둠이라고 생각했으나, 빛의 고통은 오히려 아름다움이었습니다.
 _정호승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외모, 그리고 외모지상주의라는 구체적인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어찌보면 이는 본능에 대한 이야기다. 호모 사피엔스가 가지고 있는 본능은 계륵 같은 것이다.


우리의 생존 본능, 비교하는 본능, 공격적인 본능이 문명을 만들었다. 더 빨리 달리는 차를 만들고, 더 크고 튼튼한 건물을 짓고, 더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뒤집으면 위험한 본능이다. 나보다 나은 것이 보이면 빼앗았다. 공격하고 전쟁했다. 남을 공격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공격한다. 남과 비교하고 스스로를 비하한다.


이러한 본능 중 하나가 미추를 구분하는 능력이고, 칼리를 켠다는 것은 이 본능을 잠시 끄는 것이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본능을 하나하나 다 끌 수는 없다. 지금 이대로 만족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긍정하는 삶은 더 멀어진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 부분을 읽고 설득당했다.


코카인을 예로 들어봅시다. 천연 형태의 코카 잎은 쾌감을 줍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요. 그러나 정제하고 순화하면, 그것은 여러분의 쾌락 수용기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강렬하게 자극하는 약물로 변신합니다. 그러면 중독성이 생기는 거지요.
아름다움 또한 광고주들 덕택에 비슷한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진화는 우리에게 잘생긴 외모에 반응하는 신경 회로를 부여했고, 시각 피질의 쾌락 수용기라고 부를 수 있는 이것은 자연 환경에서는 유용한 자질이었지요. 그렇지만 백만 명에 한 명밖에 없는 피부와 골상을 가진 사람에게 전문적인 메이크업과 수정을 가한다면, 여러분이 보게 되는 것은 더 이상 천연 형태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제된 약제급의 아름다움이고, 미모의 코카인입니다.
생물학자들은 이것을 '초자극'이라고 부릅니다. 어미 새에게 거대한 플라스틱제 알을 보여주면 어미 새는 자기가 낳은 진짜 알들 대신에 이 플라스틱 알을 품습니다. 매디슨 에비뉴*는 우리의 환경을 이런 종류의 자극으로, 이런 종류의 시각적 마약으로 채워놓았습니다.
 *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고급 쇼핑가. 미국 광고 산업의 총본산이다.
 _테드 창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


칼리를 켠다면, 삶에서 눈을 돌린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칼리를 켜지 않고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진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일까? 이미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 자체가 외모지상주의와 상업주의로 덕지덕지 발라져 있는 것은 아닐까?


기술이 발달하면 인식도, 윤리도 변한다. 안락사가 죄악처럼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 이제는 존엄사라는 훨씬 그럴듯한 이름으로 부른다. 죽지 못하는 상황이 죽는 것보다 불쌍하게 여겨진다.


고도로 발달된 기술로 인해, 외모, 매력 자본의 중요성이 심각한 수준으로 커졌다고 하자. 그리고 거대 자본이 이를 활용하고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에 대한 면역을 키우는 측면에서, 칼리라는 기술을 사용하는 게 오히려 균형 있게 세상을 보는 것일 수도 있다. 포경, 아니 쌍꺼풀 수술 정도는 이제 성형수술의 축에 들지도 못하는 것처럼, 언젠가 칼리는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스포츠 세계에서는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모두가 기술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정정당당하게 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요즘도 프로스포츠 분야에서 운동능력 강화 약물을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해지면서 선수들이 서로에 대해 갖는 기대치가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선발 투수가 속한 팀의 득점이 부진하면 나쁜 운을 탓하면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요즘은 암페타민이나 여타 자극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상당히 늘어나서, 그런 약제를 복용하지 않고 경기에 나오는 선수들은 “발가벗고 출전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_마이클 센델 「완벽에 대한 반론」


소설의 말미에서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다. 바로 사람의 행동을 설득력 있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영상 편집 기술이다. 소설에서 이 소프트웨어로 살짝 만진 영상은, 투표 결과에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문제의 소프트웨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사방팔방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설득력이 있는 선전 문구들의 공격에 직면하게 됩니다. 광고, 기자 회견, 전도 따위를 통해서 말입니다. 정치가나 장군은 몇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감동적인 연설을 할 것입니다. 사회운동가나 문화 게릴라 집단조차도 기존 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이 소프트웨어의 적용범위가 충분히 넓어진 후에는 영화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할 겁니다. 그럴 경우 배우 자신의 능력은 영화하고는 무관해집니다. 출연 배우들 모두가 신들린 연기를 할 테니까요.
 _테드 창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 다큐멘터리」


기술의 발달을 윤리가 따라갈 수 있을까? 테드 창이 던지는 질문이다.


오늘날은 과학의 발전 속도가 도덕적 이해의 발전 속도보다 더 빠르기에, 사람들은 이와 같은 윤리적 불안감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힘겨워한다. ... 그래서 게놈 혁명이 일종의 도덕적 현기증을 초대한 것이다.
 _마이클 센델 「완벽에 대한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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