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카를로 M. 치폴라 「중세 경제 발전에서 향료(특히 후추)의 역할」
유머와 팩트를 섞은 재미있는 역사책이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후추가 유럽의 역사에 끼친 영향을 이야기한다. 일단 후추 등장.
후추는 강력한 최음제로 알려져 있다. 그런 후추가 없었으니, 유럽인들은 지방 귀족들과 스칸디나비아 전사들, 마자르 침략자들, 아랍 해적들로 인해 초래된 인명 손실을 거의 벌충할 수 없었다. 인구는 감소했고, 도시는 텅 비었으며, 숲지와 늪지만이 점점 늘어났다.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기대하기 힘들어졌기에 사람들은 점점 더 저세상의 삶에 기대를 걸었고, 그렇게 천상에서 보상받겠다는 일념으로 현세에서 후추의 결핍을 견뎌낼 수 있었다.
후추의 부족이 유럽 기독교 융성의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중요한 후추는 십자군 전쟁의 계기가 된다. 피에르는 십자군 전쟁을 선동해서 갖은 약탈을 일삼았는데, (유럽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실존인물이다.) 저자는 후추를 가지고 이를 설명해낸다.
피에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두운 숲속에서 고요한 아름드리나무들로 에워싸인 자신의 오두막에 칩거하며 계속해서 자신의 검소한 식단에 첨가할 약간의 후추를 내려달라고 신의 섭리에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신의 섭리는 미량의 후추라도 어쨌든 최음제였기에 피에르의 영적 생활을 손상시킬 수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후추 대신 비와 눈과 번개를 피에르에게 내려보냈던 것이다.
이슬람에 침공하고 약탈에 성공한 후 유럽의 발전을 저자는 이렇게 묘사한다. 정조대를 열기 위해 유럽의 금속제련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유럽 세계는 우울하고 슬픈 시대를 뒤로하고 마법에 걸린 듯 생동감과 에너지와 낙관주의가 넘쳐나는 땅으로 변모했다. 후추 소비 증가로 활력이 충전된 남성들은 정조대를 착용한 주위의 아름다운 여성들과 어울리며 돌연 철제작에 큰 관심을 표명했다. 많은 이들이 대장장이로 변신했고, 거의 모든 사람이 정조대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미친 역사학자는 후추의 최음효과를 변수로 가지고 있는 출산율 공식을 이용해서, 유럽의 인구증가율과 소득성장률을 계산해낸다.
저자는 백년전쟁도 포도주 때문에 일어났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과정에서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이런 싸움의 불길한 귀결이 곧 '백년전쟁'으로 알려진, 실제로는 116년간 지속된 양국 간 전쟁이었다. 이 끝나지 않는 분쟁의 진정한 영웅은 한 여성, 즉 잔 다르크였다. 그녀가 영국왕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준 덕택에 프랑스산 포도주는 (영국이 아닌) 프랑스의 관리하에 '원산지 보증 표시'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긴 전쟁으로 두 나라의 재정은 거덜났고, 용병대에 의해 황폐화된 프랑스의 수많은 포도원들도 결딴났다.
오타인 줄 알았다.
결딴나다 : 어떤 일이나 물건 따위가 아주 망가져서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다.
표준어였다. (나만 몰랐?)
책의 어느 부분이 팩트고 어느 부분이 유머인지 구분하기 위해서, 열심히 검색해가며 읽었다.
이렇게 유머와 팩트(혹은 원작)를 섞어서 재미있게 버무리는 건은 이말년이 잘한다. 그가 그린 삼국지에는, 희대의 호로자식 여포가 호로관을 지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유비관우장비 3형제와 싸우는 장면을 나름의 해석을 가미해서 그렸다. 얼토당토않은 해석이지만 원작과 절묘하게 부합한다.
★★★★★ 완전 재미있다. 교과서에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