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세 번째 읽었다. 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무 우울하다는 둥. 읽고 나서 나도 우울증에 걸리는 줄 알았다는 둥, 저자의 감정에 공감한다는 감상이 많았다. 문학 초보 입장에서는 부러운 이야기였다.
처음 읽었을 때는 그 우울함에 공감하려 노력하며 읽었다. 그래도 글은 쉽게 읽혀서 쓱쓱 읽었다.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이제 조금 공감이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착각일 수도...)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다. 이번에는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와 저자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렇게 표현하네! 감탄하며 읽었다. 아무래도 스토리 상 뒷부분에서는 안타깝기 그지없었고, 중간중간 주인공에게 답답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이 책을 감싸는 주 감성이 우울감인지는 모르겠으나, 표현을 즐기면서 읽기에도 충분히 좋은 책 같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주인공 요조의 이야기다. 요조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수기를 썼고, 이 수기와 (요조의) 사진을 누군가 읽는 형태의 소설이다. 소설의 화자는 웃고 있는 요조의 사진을 보며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사진
그것은 원숭이다. 웃고 있는 원숭이다. 그저 보기 싫은 주름을 잔뜩 잡고 있을 뿐이다. '주름투성이 도련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질 만큼 정말이지 괴상한, 왠지 추하고 묘하게 욕지기를 느끼게 하는 표정의 사진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괴상한 표정의 소년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웃고 있다. 이번 미소는 주름투성이의 원숭이 웃음이 아니라 꽤 능란한 미소가 되어 있지만, 그러나 인간이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걸린다.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가면
요조는 어렸을 때부터 괴로워하며 살았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타인을 오해하기도 하고 과대평가하기도 하고 과소평가하기도 하며,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해하고 소통하기도 한다. 그런데 요조는 그런 걸 못한다. 그래서 두려워하며 가면을 쓴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애플파피
나도 비슷한 걱정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남과 비슷하다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고, 다르다고 느낄 때는 불안했던 어린 시절.
어린시절 어머니는 애플파피 (영어) 교사였다. 악어와 달팽이가 (둘이 크기가 비슷하다) 주인공인 영어 비디오다. 인형들이 나와서 이야기하고, 영어 노래도 부른다. 재미있었다.
하루종일 틀어놓고 지내다보니, 자연스레 영어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영어 발음도 비디오에 나오는 발음과 비슷했다.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했는데, 중학교에 들어가서 반장이라는 걸 하게 되었고(인싸), 일어나서 영어 본문도 종종 읽곤 했다. 그러면 자주 보고 들었던 것이, 오올~ 하는 칭찬과 놀림이 함께 하는 반응이었다. 그때는 주목받는 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일부러 발음을 다른 친구들처럼 하려고 노력했다. 원래는 한국식 발음과 미국식 발음, 이런 인식 자체가 없었는데, 열심히 노력하다보니, 이제는 미국식 발음이 안된다.
죽음
삶을 고통으로 여기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여러 번 시도한다. 이는 저자 본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는데, 이 책은 사실 자전적 소설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를 죽이려는 마음만은 안 일어났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성
요조는 (저자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꽃미남으로 묘사되는데 그래서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곤 한다. 요조의 입장에서 묘사한 여성도 재미있다.
여자는 자기가 먼저 유인했다가도 내치고, 또 남이 있는 곳에서는 저를 경멸하고 함부로 대하다가도 아무도 없으면 꼭 끌어안고, 죽은 것처럼 깊이 잠들고, 여자란 잠자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닐까 등등 그 밖에도 여자에 대한 갖가지 관찰을 저는 일찌감치 어릴 때부터 해왔습니다만, 여자는 똑같은 인류 같으면서도 남자하고는 완전히 다른 생물처럼 느껴졌습니다.
행복
워낙 불행이 익숙하다 보니 행복을 두려워 한다. 잠깐이라도 맛보게 되면 겁이 나서 도망치려 한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저는 상처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안달하며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
수기의 마지막은 아래와 같이 끝난다. 멘탈이 탈탈 털리고 난 후 요조는 조금 평안해진 것 같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낀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가수이자 서점주인인 요조는 인간실격의 요조를 보고 예명을 정했다고 한다. 이름만으로도 그 우울의 깊이를 가늠하게 된다.
★★★★★ 우울하지만 감탄하게 되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