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시몬 드 보부아르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이 부여한 한계에서 벗어나 세상을] 의식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세상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타인의 견지에서 보자면 일개 사물일 뿐이다. 인간은 집단에 의존하는 개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핍 없이는 윤리학도 없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오직 자기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는 존재,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존재, 자기를 실존시켜야만 하는 존재만이 당위적 존재가 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 존재성을 스스로 결핍시키는 존재"라고 말했다. 이 말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열정이란 바깥에서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세상과 동떨어져서 관조하는 식의 관계 외에는 세상과 그 어떤 관계도 맺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시대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역사와 대면하고,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것을 순수하게 바라보는 식의 사유에 몰두한다. 인격성이 없는 이러한 입장은 모든 사태를 동일화시켜 버린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타인의 자유가 억압당하면 내 자유도 온전할 수 없다. 자유는 세상을 향할 때만 실현된다.
자유란 열린 미래를 겨냥하지 않고서는 의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때, 진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발견된다. 그 자체로 주어진 목적은 그 어떤 성찰을 하더라도 틀림없이 [자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반면에 오직 다른 사람들이 자유만이 우리 인생을 넘어서 타인의 인생으로 확장될 수 있다.
내가 타인들을 나의 관심사로 여기고 염려해야, 그들도 나를 자기들의 관심사로 여기며 염려해 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환원 불가능한 진리를 얻게 된다. 나와 타인들 사이의 관계 맺음은 주체와 객체 간의 관계 맺음만큼이나 분리될 수 없다.
여기서의 개인은 세상 및 다른 개인과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를 초월함으로써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의 자유는 오직 타인들의 자유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인간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는 그이 바로 그 자유 속에서 그만의 법칙을 발견한다. 첫째, 그는 건설의 운동을 통해서 자기의 자유에서 달아나지 말고 그것을 떠맡아야만 한다.
나는 실존주의가 오히려 독자에게 추상적 도피의 위로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실존주의는 어떤 도피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실존주의 윤리학은 삶의 진실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만일 각 개인이 자기가 해야 할 바를 했다면, 실존은 각자 안에서 구해질 것이다. 모든 것이 죽음 안에서 화합하는 파라다이스를 꿈꿀 필요도 없이.
레비나스는 '어른'입니다. 그런 어른이 쓴 책이기 때문에 아이인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겁니다. 당연한 거 아닐까요? 어른이 쓴 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읽는 사람도 어른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레비나스의 문장은 이와 같이 수행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레비나를 붙들고 끙끙 앓으면서 줄곧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필사적으로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_우치다 타츠루 「곤란한 결혼」
그리고는 여느 때처럼 대학원에서 조교 일을 하거나 강사로 대학과 어학원을 돌아다니며 프랑스어도 가르쳤지요. 합기도 수련도 하고 가사와 육아도 함께 병행했습니다.
꽤 시간이 흘러 출판사 편집자가 제게 "그 원고는 어떻게 되었죠?"라고 물었을 때에야 비로소 "아, 그거!" 하고는 처박아둔 원고를 꺼내어 휘리릭 읽어보는데 내용이 이해가 가더군요. '이해가 간다'라기보다는 '이해가 가는 부분이 몇군데 있었다'는 정도입니다만, 그래도 '전혀 모르겠다'는 상태에서 '조금은 이해가 간다'는 수준이 된 셈이지요. 제 자신이 변화한 겁니다.
_우치다 타츠루 「곤란한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