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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Sep 03. 2019

타인의 자유를 통해서 얻는 자유

 _시몬 드 보부아르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괴로운 하루였다. 니체도 한병철도 여러 번 읽다 보면 이해가 되던데, 이 책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고 하루를 갖다 바쳤는데 결국 눈만 열심히 움직인 셈이 되었다.


주의!! 아래 글은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쓴 글입니다. 읽어도 영양가가 없어욧!!


저자는 시몬 드 보부아르. 사르트르의 연인이자, 유명한 여성 철학자다. 굳이 성별을 밝힌 이유는 그만큼 여성 철학자가 적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읽었다.


철학책이니 당연히 재미없다. 출판사에서는 저자의 책 2권을 「모든 사람은 혼자다」,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이렇게 힐링 책 느낌 나도록 이름을 짓고 (원제는 절대 읽고 싶지 않은 느낌이다.) 표지도 이쁘게 만들었다. (당했어!!)



칸트, 헤겔,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해 평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니, 책의 90퍼센트 이상은 결국 이해 못했고, 이해한 부분만 간단히 소개한다.


애매성


인간의 실존은 애매하다.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세계의 일부다. 그 자체가 목적이면서, 타인의 시선에서는 사물이자 수단이다.


인간은 [자연이 부여한 한계에서 벗어나 세상을] 의식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세상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타인의 견지에서 보자면 일개 사물일 뿐이다. 인간은 집단에 의존하는 개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핍


인간은 그 자체로 결핍을 가지고 있다. 완전하다면 인간이 아니다.


결핍 없이는 윤리학도 없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오직 자기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는 존재,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존재, 자기를 실존시켜야만 하는 존재만이 당위적 존재가 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 존재성을 스스로 결핍시키는 존재"라고 말했다. 이 말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열정이란 바깥에서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타인


개인의 애매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타인, 바로 이 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2차대전을 겪으면서 타인이 학살당할 때 나 혼자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세상과 동떨어져서 관조하는 식의 관계 외에는 세상과 그 어떤 관계도 맺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시대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역사와 대면하고,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것을 순수하게 바라보는 식의 사유에 몰두한다. 인격성이 없는 이러한 입장은 모든 사태를 동일화시켜 버린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타인의 자유가 억압당하면 내 자유도 온전할 수 없다. 자유는 세상을 향할 때만 실현된다.
자유란 열린 미래를 겨냥하지 않고서는 의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때, 진리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발견된다. 그 자체로 주어진 목적은 그 어떤 성찰을 하더라도 틀림없이 [자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반면에 오직 다른 사람들이 자유만이 우리 인생을 넘어서 타인의 인생으로 확장될 수 있다.
내가 타인들을 나의 관심사로 여기고 염려해야, 그들도 나를 자기들의 관심사로 여기며 염려해 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환원 불가능한 진리를 얻게 된다. 나와 타인들 사이의 관계 맺음은 주체와 객체 간의 관계 맺음만큼이나 분리될 수 없다.



그는 다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 속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의 개인은 세상 및 다른 개인과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를 초월함으로써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의 자유는 오직 타인들의 자유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인간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는 그이 바로 그 자유 속에서 그만의 법칙을 발견한다. 첫째, 그는 건설의 운동을 통해서 자기의 자유에서 달아나지 말고 그것을 떠맡아야만 한다.
나는 실존주의가 오히려 독자에게 추상적 도피의 위로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실존주의는 어떤 도피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실존주의 윤리학은 삶의 진실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만일 각 개인이 자기가 해야 할 바를 했다면, 실존은 각자 안에서 구해질 것이다. 모든 것이 죽음 안에서 화합하는 파라다이스를 꿈꿀 필요도 없이.


내가 이해한 건 여기까지다.


어른


우치다 타츠루는 레비나스를 연구한다. 젊었을 때는 레비나스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레비나스는 '어른'입니다. 그런 어른이 쓴 책이기 때문에 아이인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겁니다. 당연한 거 아닐까요? 어른이 쓴 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읽는 사람도 어른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레비나스의 문장은 이와 같이 수행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레비나를 붙들고 끙끙 앓으면서 줄곧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필사적으로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_우치다 타츠루 「곤란한 결혼」


그가 느꼈을 답답함이 이런 것일까. 너무 답답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전제해야 할 내용들이 있을 텐데 그것들을 모르니 더 막막하다. 나도 '시몬 드 보부아르를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외치고 싶지만, 읽어야 할 책은 많으니, 그냥 다른 책을 보련다.


물론 우치다 타츠루는 나중에 레비나스를 이해했다고 한다. 공부를 통해서 이해한 것은 아니고 가사와 육아를 통해서였다.


그리고는 여느 때처럼 대학원에서 조교 일을 하거나 강사로 대학과 어학원을 돌아다니며 프랑스어도 가르쳤지요. 합기도 수련도 하고 가사와 육아도 함께 병행했습니다.
꽤 시간이 흘러 출판사 편집자가 제게 "그 원고는 어떻게 되었죠?"라고 물었을 때에야 비로소 "아, 그거!" 하고는 처박아둔 원고를 꺼내어 휘리릭 읽어보는데 내용이 이해가 가더군요. '이해가 간다'라기보다는 '이해가 가는 부분이 몇군데 있었다'는 정도입니다만, 그래도 '전혀 모르겠다'는 상태에서 '조금은 이해가 간다'는 수준이 된 셈이지요. 제 자신이 변화한 겁니다.
 _우치다 타츠루 「곤란한 결혼」


★★★★ 아주 재미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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