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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Oct 01. 2019

느릿느릿하던 시절

 _무라카미 하루키 「반딧불이」

하루키는 대단하다. 별 거 아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빠져든다.



주인공 이름은 안 나오는데 왠지 와타나베*일 것 같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상들을 적는다. 바깥 풍경을 보고, 지인과 이야기하고, 이성과 산책한다.


 * 와타나베 :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이다.


다양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중 지인에 대한 묘사가 제일 좋았다.


내 룸메이트는 지리를 전공했다.
"나는 지, 지, 지도 공부를 하고 있어." 그는 처음에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지도를 좋아해?" 나는 물어보았다.
"응, 졸업하면 국토지리원에 들어가서 말이야, 지, 지도를 만들 거야."
세상에는 실로 다양한 종류의 소망이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그때까지 나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동기로 지도를 만드는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도'라는 말을 할 때마다 더듬는 인간이 국토지리원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도 신기했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 말을 더듬기도 하고 안 더듬기도 했지만, '지도'라는 말이 나올 때만큼은 백 퍼센트 확실히 더듬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에는 동경하는 동성 친구가 종종 등장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요한이라거나, 「데미안」의 데미안. 그리고 이 책에서는, 현 여친의 전 남친. 이렇게 표현하면 조금 이상할 수 있지만. 글을 읽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실로 하루키의 힘이다.


그는 그런 것에 아주 탁월했다. 약간 냉소적인 성향은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친절하고 예의바른 남자였다. 그는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똑같이 농담을 하며 놀렸다. 어느 한쪽이 침묵하고 있으면 이내 그쪽에 말을 걸어 능숙하게 상대의 얘기를 이끌어냈다. ... 그래서 그와 얘기를 나누다보면 때때로 내가 무척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소설의 배경에서는 기숙사에 공용 전화기가 놓여있다. 그래서 통화를 하려면 '누구 좀 바꿔주세요' 하고 요청해야 한다.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전화가 있는 로비의 의자에 앉아 그녀의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는 삼 주 동안 걸려오지 않을 때도 있고, 이 주 연속으로 걸려올 때도 있었다. 그래서 토요일 밤에는 언제나 로비 의자에서 그녀의 전화를 기다렸다. 토요일 밤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놀러 나가기 때문에 로비는 대체로 조용했다.


짧은 소설인데. 느릿느릿하다. 주인공들은, 고민하고 걷고 생각하고 기다린다. 그 기다림 속에서 묘하게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난간에 기댄 채 그런 반딧불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만이 우리 사이를 강물처럼 흘러갔다. 느티나무가 어둠 속에서 무수한 잎들을 비벼댔다.
나는 언제까지고 계속 기다렸다.


모든 게 느릿느릿하던 시절을 그린다. 그리운 것은 그 시절일까. 아니면 느릿느릿일까.


★★★★ 하루키식 유머랄까. 너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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