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만큼이나 명확하지 않은 단어다. 그래서 정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주장을 '공정'하다고 주장하곤 한다.
조국 교수의 딸이 고등학교 때 논문 저자로 등재된 것을 가지고 공정하지 않다며 언론에서는 떠든다. 그 의견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정치인들은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공정'에 반기를 들 수는 없으니 적당히 맞장구 치고 있다.
공정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공정이란 무엇인가. 출발선, 달리기, 기회 등 여러 단어를 활용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는 쉽다. 공정이라는 개념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평범하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다. 부모가 의사고 조부모는 건물주인 아이가 있다. 이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대학에 진학해야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흙수저 아이는 흙흙 동네학원과 EBS 방송을 통해서 열심히 공부한다. 죽어라 공부한다.
금수저 아이는 금금 쪽집게 과외를 받고 방학은 미국에서 보낸다. 해외봉사, 동아리, 논문 참여 등등 자기소개서 종이가 너무 작아서 못 쓸 정도다. 이 아이도 열심히 공부한다. 죽어라 공부한다.
과정과 결과로 나눠서 이야기해보자.
과정
과정은 공정한가. 왜 금수저는 흙수저가 꿈도 못 꿀 혜택을 받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면 금수저도 과외 못받게 하고 해외 못 나가게 하면 공정한 걸까. 태어난 환경이 다른데도 들고 있는 수저가 금이라고 욕하는 사람의 마음은 공정을 격하게 외치고 있다. 금수저를 부러워하는 마음의 크기만큼 격하게 외친다.
결과
결과가 어떻게 나와야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 금수저만 서울대에 가면 공정하지 않은 걸까. 흙수저는 서울대에 갈 수 있을까. 만일 열심히 공부한 흙수저까지 서울대에 가야 공정하다고 말한다면, 서울대 정원을 몇 배로 늘려야 할까.
입시와 관련해서는 공정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쉽지 않다. 공부하기 좋은 환경, 입시에 유리한 환경을 상속받는 것은 공정한가. 그렇다면 암기력, 계산력, 응용력을 물려 받는 것은 공정한가. 노력하는 능력, 오랫동안 앉아있는 끈기력과 인내력까지 물려 받는 것은 공정한가.
언론에서 말하는 '공정'은 과정과도 결과와도 상관이 없다. 사실 공정의 의미는 따로 있다. 바로, 욕 먹지 않는 것. 그게 교육 정책을 정하는 사람들의 목표다. '욕 먹지 않는 것'은 너무 기니 두 글자로 줄여서 '공정'이라 부른다.
교육 정책
학생들을 수능 시험으로 길게 줄 세우면 획일적이라고 욕 먹는다. 그래서 수시니 학종이니 하는 전형을 다양하게 늘린다. 이번에는 부자에게 유리하다고 욕 먹는다. 다시 정시 비율을 늘린다. 다양하게 할 때도, 획일적으로 할 때도, 욕 먹기 싫다는 의미에서 '공정'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그러니 입시에서 공정이라는 단어는 쓰레기통에 넣어야 한다. 어차피 아무 의미 없다. 아이들을 한줄로 세우는 방법을 고를 때 욕 안먹으려고 붙이는 수식어에 불과하다. 공정이 빠져도 아이들은 배우고 자란다. 게임방에서 키보드 두드리며 담배를 배우고, 짝사랑으로 아픈 가슴이 자란다. 교사 발걸음을 보고 배우고, 어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며 자란다.
'풀잎마다 천사가 있어 날마다 속삭인다. 자라라, 자라라.' _공지영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위녕, 오늘 이 시간이 지루하고 힘드니? 너의 어린 뿌리를 더 깊이 대지 아래로 뻗으라는 천사의 속삭임으로 들어 보겠니? 친구가 밉니? 혹시 그 아이는 변장하고... 내려온 천사일지도 모르지. 아니 천사를 믿지 않아도 생각해 봐. 엄마의 보이지 않는 눈길이 널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네 머리카락과 네 팔 다리, 손가락 하나하나, 네 마음 결 하나하나에 응원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자라라, 자라라 하고. _공지영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