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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Jan 16. 2020

욕망 들여다보기

 _알랭 드 보통 「섹스」

맞다. 제목 때문에 샀다. 그런데 저자가 알랭드보통이라니. 역시나 아주 고상한 책이다. 보통이형이랑 술 마시면 음담패설도 아주 고급스럽게 할 것 같다.



성욕과 섹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한다. 항상 하듯이 낭만주의 이야기도 당연히 한다.


얼굴 붉히기


나는 항상 부끄러움을 숭상했다. 뻔뻔한 사람이 멋있어 보이는 순간보다는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훨씬 많았다. 그 이유를 보통이형이 정확히 언어화시켜준다.


얼굴이 빨개지는 순간에는 상대방이 나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가능성이 주는 전율과 나를 거부할지 모른다는 수치심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내가 타인에게 귀찮은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하는 것 즉 나의 호감 표현이 상대에게 달갑지 않을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매우 윤리적인 태도다. 그 밑바탕에는 타인의 마음에 세심하게 신경 쓰는 마음가짐, 그리고 내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수줍음을 타는 사람은 자신이 폐를 끼칠 가능성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사람이다.



흥분


성적 흥분은 허용과 관련이 있다. 누군가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이고, 나에게만 특별히 허락해준다는 고마움이다.


대개 그 고마움은 상대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락받았을 때가 아니라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있을 때, 막 통행권을 부여받았을 때, 섹스에 대해 흔히 가지는 금기적 사고가 아직 강하게 마음에 남아 있을 때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거절당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르면서 받아들여졌다는 경이로움이 강렬하고 황홀한 안도감으로 바뀐다.



오럴 섹스


보통이형 책에는 오럴 섹스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더러워 보이는 성기와 깨끗해 보이는 입이 만날 때 느끼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섹스는 우리를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라는 가혹한 이분법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준다. 섹스는 우리 모습 가운데 가장 불결해 보이는 부분을 게임에 끌어들임으로써 역설적으로 깨끗하게 정화해준다. 우리는 얼굴에서 가장 공적이고 고귀한 신체 부위인 입을 연인의 가장 불결한 신체 부위에 열정적으로 밀착시킨다.



강간에 대한 판타지


실제로 행하면 나쁜 짓이지만 누구나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 끔찍한 범죄와 달리 마음의 스위치를 끄면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안전한 흥분장치다.


강압적인 섹스를 상상하며 에로틱한 흥분을 느끼는 것은 내가 마음속 깊이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매몰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흥분은 내가 타인의 행복과 만족에 이미 너무나도 깊이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평소에 타인을 배려하고 깊이 신경 쓰기 때문에, 가끔은 그런 태도를 과감히 던져버리고 잠시나마 잔인하고 냉혹해진 자신을 상상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양성애


떠올리는 것만으로 민망하거나 부끄러운 상상들이 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무언가를 해야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충분히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않을 수 있다.


상상력을 통한 공감의 확장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는 내면의 또 다른 자아를 만나고 느낀 두려움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톨스토이 작품을 읽고 농민의 삶에 매력을 느낀 독자라고 해서 도시 생활을 당장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 오두막에 살면서 밀을 탈곡하는 농사꾼이 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나의 내면에 불필요한 거부감이나 두려움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내면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했다고 해서 실제 삶을 거기에 맞추어 완전히 다시 설계할 필요 없이 그저 그 자아를 기꺼이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자극적인 소재로 이렇게 정갈하게 만들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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