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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Feb 27. 2020

진정한 아름다움 따위

 _앤드류 포터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세 번 정도 읽으니까 이해가 갔다. 네 번 읽으니 머릿속으로 정리가 된다. 그렇다고 내용이 어려운 건 아니다. 워낙 다양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지금 이 내용이 왜 나오는 거지? 하는 의문이 종종 든다. 저자가 엄청나게 수다스러워서 관련된 부분을 다 이야기한다. 상식이 늘어난다는 장점은 있으나, 캐나다 혹은 미국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만한 소재들이 대부분이라, 고개를 아주 많이 끄덕일 수는 없다.



나는 평소에 진정성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없긴 없는데, 뭐라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이 책이 눈에 딱 하고 들어왔다. 진정성이 거짓말이라니! 역시 내 생각과 같은 방향의 책이었다.



다양한 단어로 변주되기는 하지만, 우리는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이건 진정한 ㅇㅇ이 아니야. 보통 부정형으로 쓰인다.


광고업자나 정치인이 진짜라고 우기는 허상에서 벗어나 삶의 진실을 되찾고 싶은 욕구


진정성이 뭔지 딱 말하기 어렵지만, 보통 정치인이 말하는 것들의 반대, 혹은 광고의 반대를 의미한다.


첫째, 진정성은 그게 아닌 것이 무엇이야를 짚어내 그 반대로 이해하는 것이 최적인 용어다. 둘째, 진정성이 뭐든 간에 사람들은 그것을 확실하게 원한다. 즉, 어떤 것을 '진정성 있다'고 묘사하면 그것은 언제나 좋은 것을 뜻한다.


진정성을 찾는 마음의 밑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자는 루소를 꺼낸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외부의 내가 아니라, 내면의 진정한 내가 있다는 것이다.



루소가 고민한 철학적 과제의 본질적 관심사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처한 상태에서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구분하는 일이다. 문명은 인간 본성을 왜곡하지만, 그 왜곡의 정확한 윤곽은 잘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루소가 시도하려는 것은 '나는 누구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자신이 진정 누구냐 하는 문제는 사회생활에서 쓰는 가면과 맡은 역할을 전부 벗어버리고 사소한 경쟁과 게임에서 물러나, 사회의 헛된 요구가 아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좇을 때 비로소 규명될 수 있다.


여기에서 시작한다. 사람들은 진정한 나를 찾는다. 각종 분야에서 찾는다. 진정한 예술을 찾고, 진정한 정치인을 찾고, 진정한 집을 찾고, 진정한 삶을 찾는다. 그게 허상임을 밝히는 책이다.


예술


진정한 예술은 무엇일까. 에곤 실레의 그림이 비싸게 팔렸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덧칠을 했다는 게 뒤늦게 밝혀진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작품의 아름다움에 감동해서 샀다고 한다면 덧칠이 조금 있더라도 상관없는 것일까?


이 일은 결국 법정 다툼으로 번졌고, 판사는 원작을 복원하는 것이 의도였다면 지나치게 많은 부분을 덧칠했다 해도 문제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실레가 원작에 보라색으로 써넣은 성명 머리글자를 복원자가 검정색으로 덧칠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판사는 그것은 정도를 넘은 행위라고 보았다.


이건 약과다. 현대의 개념미술로 들어오면, 누가 그렸느냐는 문제도 아니다. 데미언 허스트의 한 작품은 상어를 유리에 넣고 포름알헤이드로 채운 것이다. 매우 비싼 값에 팔렸다. 그런데 보존을 잘못해서 상어가 부패해버렸다. 그래서 상어를 교체했다. 처음 만든 예술작품과 나중에 상어를 교체한 것은 같은 예술작품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서 100만 파운드로 살 수 있는 것 중에 유명 상표 현대미술품처럼 사회적 지위와 인정을 가져다주는 물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핵심은 허스트가 예술 작품이 아니라 중증 지위불안증에 걸린 부자들에게 치료제를 팔고 있다는 거다.


예술작품은 브랜드다. 그리고 이 브랜드는 지위를 과시하는 데 쓰인다.


요즘 현대미술 작품들은 개념도 황당하고 솜씨도 미숙해서 "우리 애도 저 정도는 그리겠네"라는 문외한들의 전형적인 불평은 오히려 애들에게 모욕일 지경이다. 그러나 그런 불평은 초점을 벗어난다. 작품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팔리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페르소나 또는 '브랜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미술가 중에 데미언 허스트만 한 브랜드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


우리는 진정성 있는 정치인을 원한다. 어차피 투표는 잘 하지 않지만, 표를 얻기 위해 말을 꾸며낸다고 생각하면 표를 주지 않는다. TV가 등장하면서 정치인은 이미지가 되었다. 멋진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정치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꾸밈없는 사람이 나타나면 욕을 한다. 준비되고 계획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비웃는다. 우리는 이미지에 표를 던진다.


TV는 남녀 정치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그 때문에 카메라 앞에서 적절히 행동할 줄 아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자질로 부각됐다. 사람들은 흔히 휠체어에 앉은 플랭클린 루스벨트는 요즘 같으면 대통령에 당선될 꿈도 못 꾸었을 거라고 말하는데, 1930년대에 TV가 존재했다면 아마 대통령은커녕 뉴욕 주지사도 못 됐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최고의 정책을 내세우거나, 제일 경험이 많거나, 가장 노련한 팀을 갖춘 후보가 아니라, 함께 맥주 마시고 싶은 사람을 매번 지도자로 선택했다.


저자가 밝히고 싶은 건 광고가 아니고 정치인이 아니고 예술가도 아니다. 바로 우리의 위선이다. 우리는 진정성을 원한다고 착각하지만 진정한 것은 없다. 단순히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라 얻는 게 많았다. 물론 다른 저자가 썼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를 나는 왜 좋아하는가. 생각해볼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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