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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Mar 09. 2020

추구해야 하는 것은 육체 그리고 쾌락

 _마광수 「육체의 민주화 선언」

언제나 남들을 부끄럽게 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광수, 그의 책을 읽었다. 체계적인 주장을 하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일기에 가깝다. 성과 육체 그리고 자유와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든다. 중학생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썼다.



처음에는 허걱, 하게 된다. 굉장히 노골적이고 극단적이다. 맞긴 맞는데.. 하면서도 표현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
인생의 행복은 오로지 성적 만족에 의해 결정된다. 명예, 돈, 군력 등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많지만 그것은 결국 '성의 자유로운 포식'을 위한 준비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정 행복감이란 허위의식에 가득 찬 은폐일 뿐이다. 구체적인 행복감은 육체적 쾌락에서만 온다.
육체가 배고플 때 정신이 맑아질 수는 없다. 육체가 배부르면 느긋해지고 객관적 · 철학적이 된다. 선진국이 되면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섹스를 즐기는 돼지가 낫다"고 가치관이 바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를 중진국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선진국이라는 표현을 썼다. 위의 인용문만 봐도 저자가 얼마나 눈치 안보고 달려드는지 판단이 될 것이다. 그는 그래서 왕따이고 구속되었고, 이를 이겨내는 삶을 살았다. 다양한 이야기를 두서 없이 쏟아내는데, 한편으로는 동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동의한다.


도덕


도덕은 성적인 죄의식을 만든다. 죄의식은 금욕주의를 만들고 여기서 만들어진 복종은 결국 지배층에게 이용당한다. 마광수의 독특한 시선은 아니고, 에리히 프롬을 비롯한 여럿 지식인들이 주장한 내용이다. 근면성실한 독일 국민들이 왜 히틀러에게 투표했을가에 대한 고민과 탐구의 결과다.


독재자들은 언제나 보수윤리를 가지고 민중들의 '육체적 자유'를 막는다. 유신시절 그토록 강조되던 충효사상이 그렇고, 퇴폐풍조 단속이 그렇다. 장발 단속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을 벌인 것이 바로 그 시절이었다. 누가 마음대로 퇴폐의 기준을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추구


고통은 피하고 쾌락은 추구해야 한다.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야한다.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받아들이라는 스님 같은 이야기를, 그는 거부한다.


자연이 '사정'이라면 인공비는 '발기의 지속'이다. 자연이 '출산의 고통'이라면 자연을 극복하는 과학은 '무통분만'이나 '자식 기르기의 거부'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은 가난하고, 못생기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골치가 아프면 아스피린이라도 먹어 순간적으로라도 고통을 모면해야 한다. 얼굴이 못생겼으면 화장하고 머리 길게 기르고 정 안 되면 성형수술이라도 해야 한다.


일리가 있다. 열심히 노력해서 번 돈은 금수저로 태어나 그냥 주어진 것보다 값진 게 아닌가? 그런데 왜 노력해서 얻은 외모는 성괴라는 멸칭을 얻게 되는가.



도덕이나 고상한 이념은 던져버려야 한다. 대신에 우리가 추구할 건 자유고 이는 육체의 자유, 쾌락의 자유가 될 것이다. 그렇게 얻는 건 행복이고 쾌락이다. 잃게 되는 것은 고통 그리고 체면일 거다.


다른 한편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육체적 쾌락을 선으로 규정한다. 물론 그렇다고 마광수가 하루종일 섹스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는 글을 썼고 아이들을 가르쳤고 쓴 글이 야하다는 이유로 감옥에 다녀오기까지 했다. 바쁜 와중에 짬내서 틈틈이 야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표현이 강조의 성격을 띤다고 넘어가자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성이 매우 중요한 것 맞다. 거기서 가장 솔직한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성욕이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려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성욕 해소가 행복이라는 것도 맞다. 동의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과 쾌락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까. 마광수의 주장에 거의 대부분 동의할 수 있지만, 역시 아쉽다. 그의 의견에는 중요한 게 빠져있다.


모두가 삶에서 행복을 찾는 건 아니다. 카뮈는 의미를 찾고 니체는 성장을 찾는다. 의미나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행복이라는 부산물을 얻는 것과 행복 자체를 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가치관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행복, 육체적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지, 그는 답해야 한다. 이렇게 까도 마광수는 대답이 없다.



마광수

1951~2017


교수라는 신분으로 조금의 허세도 과시도 없이 말하는 마광수. 그에게서 체면이라거나 위신은 찾아볼 수 없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을 했지만, 이는 체포와 처벌을 포함한 자유였다. 가시밭길임이 확실하지만 옳다고 생각한 길을 평생 걸은 그. 모든 전문가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왕따시키고 비난했다. 오로지 강준만을 제외하고.


나는 2년전 [즐거운 사라]를 읽으면서 처음엔 언어의 천박함에 놀랐다. 그러나 당시 마광수의 구속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내가 마광수에 대해 의외로 무지했다는 반성을 하게 민들었다. 왜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고 난해하기까지 한 문학평론을 잘 쓰는 마광수가 [즐거운 사라]에 좀 어려운 말 몇 마디 집어넣거나 말을 이리저리 비비 꼬고 돌리는 따위의 수사법을 사용해 좀 더 철저하게 문학을 위장하지 않았던지 나는 뒤늦게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그가 적지않은 사람들에게 천박하게 생각될 것이 틀림없는 상스러운 직설법만을 사용했던 이유는 한국의 일부 문인들이 두껍게 뒤집어쓰고 있는 '문학신성주의'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나에게 그런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는가? 바로 문인들이다. 나는 마광수가 구속되었을 때 문단의 거센 반발을 예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반발은 너무도 옹색했다. 문인 2백여명이 '문학작품 표현자유 침해와 출판탄압에 대한 문학 출판인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고 조그마한 시위를 벌이긴 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마광수 소설의 문학성은 인정할 수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었다.
문학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그건 마광수 구속이 사법 당국의 고유영역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문학성'이란 '문학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의 여지'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어야 마땅할 터인데, 우리네 문인들은 너무도 획일적인 '문학성'개념에 집착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것이 마광수가 개탄해 마지 않았던 우리 문단의 현실이구나 하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_강준만 「마광수를 위한 변명」
마광수에게 모든 답을 요구하는 건 무리다. 그는 사실 외외로 순진하다. 그는 '문단 정치'의 문외한이다. 그는 대중매체를 적극 활용하긴 했지만, 언론과의 유착을 통해 자신의 '상품'의 마케팅 근거를 확보하고자 하는 일부 유명 문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는 자기 혼자 잘난 맛에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외롭다. 하지만 그는 주위 눈치를 보지 않고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뜨거운 정열을 갖고 있다. 그는 포장술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무모한 면까지 갖고 있다. 그건 아마도 그의 성격 탓일 것이다.
 _강준만 「마광수를 위한 변명」


★★★★★ 맞는 말을 이렇게 천박하게 하다니. 그런데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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