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마광수 「육체의 민주화 선언」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
인생의 행복은 오로지 성적 만족에 의해 결정된다. 명예, 돈, 군력 등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많지만 그것은 결국 '성의 자유로운 포식'을 위한 준비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정 행복감이란 허위의식에 가득 찬 은폐일 뿐이다. 구체적인 행복감은 육체적 쾌락에서만 온다.
육체가 배고플 때 정신이 맑아질 수는 없다. 육체가 배부르면 느긋해지고 객관적 · 철학적이 된다. 선진국이 되면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섹스를 즐기는 돼지가 낫다"고 가치관이 바뀔 것이다.
독재자들은 언제나 보수윤리를 가지고 민중들의 '육체적 자유'를 막는다. 유신시절 그토록 강조되던 충효사상이 그렇고, 퇴폐풍조 단속이 그렇다. 장발 단속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을 벌인 것이 바로 그 시절이었다. 누가 마음대로 퇴폐의 기준을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자연이 '사정'이라면 인공비는 '발기의 지속'이다. 자연이 '출산의 고통'이라면 자연을 극복하는 과학은 '무통분만'이나 '자식 기르기의 거부'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은 가난하고, 못생기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골치가 아프면 아스피린이라도 먹어 순간적으로라도 고통을 모면해야 한다. 얼굴이 못생겼으면 화장하고 머리 길게 기르고 정 안 되면 성형수술이라도 해야 한다.
나는 2년전 [즐거운 사라]를 읽으면서 처음엔 언어의 천박함에 놀랐다. 그러나 당시 마광수의 구속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내가 마광수에 대해 의외로 무지했다는 반성을 하게 민들었다. 왜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고 난해하기까지 한 문학평론을 잘 쓰는 마광수가 [즐거운 사라]에 좀 어려운 말 몇 마디 집어넣거나 말을 이리저리 비비 꼬고 돌리는 따위의 수사법을 사용해 좀 더 철저하게 문학을 위장하지 않았던지 나는 뒤늦게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그가 적지않은 사람들에게 천박하게 생각될 것이 틀림없는 상스러운 직설법만을 사용했던 이유는 한국의 일부 문인들이 두껍게 뒤집어쓰고 있는 '문학신성주의'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나에게 그런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는가? 바로 문인들이다. 나는 마광수가 구속되었을 때 문단의 거센 반발을 예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반발은 너무도 옹색했다. 문인 2백여명이 '문학작품 표현자유 침해와 출판탄압에 대한 문학 출판인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고 조그마한 시위를 벌이긴 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마광수 소설의 문학성은 인정할 수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었다.
문학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그건 마광수 구속이 사법 당국의 고유영역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문학성'이란 '문학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의 여지'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어야 마땅할 터인데, 우리네 문인들은 너무도 획일적인 '문학성'개념에 집착하고 있었으며, 바로 이것이 마광수가 개탄해 마지 않았던 우리 문단의 현실이구나 하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_강준만 「마광수를 위한 변명」
마광수에게 모든 답을 요구하는 건 무리다. 그는 사실 외외로 순진하다. 그는 '문단 정치'의 문외한이다. 그는 대중매체를 적극 활용하긴 했지만, 언론과의 유착을 통해 자신의 '상품'의 마케팅 근거를 확보하고자 하는 일부 유명 문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는 자기 혼자 잘난 맛에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외롭다. 하지만 그는 주위 눈치를 보지 않고 진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뜨거운 정열을 갖고 있다. 그는 포장술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무모한 면까지 갖고 있다. 그건 아마도 그의 성격 탓일 것이다.
_강준만 「마광수를 위한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