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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Mar 06. 2020

혀를 절레절레 내두르다 절에 가고 싶은 책

 _박민규 「카스테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작가 한둘은 있을 것이다. 나는 박민규를 좋아하고, 밀란 쿤데라를 좋아한다. 물론 미야베 미유키도 좋아하고, 강준만도 좋아한다. 누가 들으면, '좋아한다'는 단어가 이렇게 소박한 거였나? 할 정도로 소박하게 좋아한다. 박민규의 작품 중에는「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괴이한 이름의 책을 읽었다. 단 한 권이었지만, 그 책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밀란 쿤데라의 작품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한 권만 읽었다. 누군가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면,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다. 그 정도로 두 책과 두 작가를 마음 속 깊은 곳에 넣어놨지만 다른 작품을 읽을 생각은 못했다. 엄두도 못 냈다. 인류의 진보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로 기술은 발전한다. 처음 천을 만들고, 가발을 만들던 한국은 라디오, 냉장고, 자동차를 크기 순서대로 착착 만들어내더니, 이제는 다시 조그마한 스마트폰을 사과보다 탐스럽게 만드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까 종이책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찍어낸다는 뜻이다.


한국전쟁 이후로 소득은 늘어간다. 남매 중 가장 똘똘한 한 녀석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면, 나머지 형제자매들은 공장에서 타이밍이라는 약을 먹으며 졸음을 참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 이제 둥글둥글한 브라운관은 컬러 티비로, 그것도 아주 얇은 놈으로다가 교체되었고, 티비보다 더 비싼 핸드폰은 노예계약이 끝나는 시기마다 갈아치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종이책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사들인다는 뜻이다.


그렇다. 진보의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글자를 인식하고 뇌가 받아들이는 데는 걸리는 시간은 아직인데, 카드는 건네지고, 책은 종이봉투에 담긴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 속도보다 사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뜻이다.


이런 연고로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한다는 작가들의 책이 집에 여러 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읽을 생각도 못했다. 뒤에 있기 때문이다. 땅은 한국전쟁 이후로도 넓어지지 않는데, 소득은 늘어나니, 좁은 원룸은 몇 겹의 책으로 둘러쌓일 수밖에 없다. 앞에 쌓여있는 책을 먼저 읽어야 뒤에 있는 책에 손을 댈 수 있다. 그러다 오늘 이 책 「카스테라」에 손을 댔다. 두근두근 하며 읽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속도감, 심장이 뛰는 속도는 정확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었을 때와 같았다. 그냥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어서 기뻤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글이 길어졌다.



저자는 냉장고라는 평범한 사물을 가지고 이러한 걸작을 만들어놓았다. 냉장고에 이러저러한 감정을 느끼고, 또 이것저것을 넣는다. 하나라도 언급을 해버리면 감동을 해칠 수 있으니 꾹 참겠다.



냉장고의 보급은 인류의 삶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가장 획기적인 성과 중 한 가지는 식중독, 암 등 질병의 발생률을 대폭 낮춘 것이다. 신선한 야채를 항상 먹을 수 있는 점과 소금에 절이지 않은 생선의 섭취, 그리고 변질되지 않은 식품을 먹음으로써 현대의 인류가 건강한 생활을 누리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다. 냉장고를 통해, 비로소 인류는 부패와의 투쟁에서 승리한다. 환상적인 승리였다. 따라서 20세기를 냉전의 시대로 보는 시각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20세기의 인류가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다른 무엇보다 이 환상적인 냉장술이었다. 그렇다. 20세기는 환상적인 냉장의 시대였다.
 _박민규 「카스테라」


일반적인 느낌의 소설은 아니다. 아주 특이하고 괴이하다. 그래서 그런지 독후감도 아주 괴상하다.


★★★★★ 혀를 절레절레 내두르다 절에 가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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