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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Apr 07. 2020

독자의 명치를 때린다

 _이지원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민음사라는 대기업이 독립서점이라는 골목식당에 들어왔다. 쏜살이라는 브랜드로, 작고 이뻐서 소장하지 않을 수 없는 책들을 찍어내고 있다. 그리고 독립서점에 공급한다. 이뻐서 안 살 수는 없으니까, 투덜투덜 하며 샀다. 처음 보는 작가인데, 뭐 얼마나 잘 썼겠어, 하며 읽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역시 미원을 넣고 다시다를 넣어야 음식이 맛있듯이, 대기업의 책은 강력했다.


대기업에 진 것 같은 억울한 마음으로 읽었다. 디자인이 이쁜데다, 얇고 가볍다. 세상에나, 가격은 7800원이다. 나는 알라딘에서 사서 3600원을 줬다. 이보다 더 좋은 책을 써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독립출판사 사장은 좌절한다. 민음사 이 나쁜놈들. 그리고 동시에, 작가로서 책을 낸다면, 쏜살 시리즈에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쏜살 아니면 유유.



스프


단순한 일상을 그린다. 하지만 저자가 묘사하는 일상은 감정적이고 감성적이다.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종종 보여주는데, 와 하며 공감하기도 하고, 뭐 이렇게까지;; 하며 거리를 두기도 한다.


이런 불편은 라면 스프를 뜯을 때 극도에 달한다. 면발을 꼬들하게 읽히기 위해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제대로 열리지 않는 스프 봉투를 만나면 고혈압으로 쓰러질 것 같다. 신라면 스프는 완전히 열리지 않고 작은 구멍만 나기 일쑤다. 명함보다 작은 포켓을 붙잡고 실랑이를 하는 사이, 라면은 우동 면발처럼 불어 터지고, 세상에 잘될 일은 하나도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나를 덮친다.


라면 스프 이야기 하나도 이렇게 극적으로 표현해 낸다.


연봉


저자의 분노는 날카로움도 어마어마하지만, 실명을 원칙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아주 뾰족하다. 삼성을 비록한 재벌에 대한 분노도 아주 크고, 유명인과 관련한 사건들도 종종 등장한다. 라면 먹을 때는 라면이름이 나오고, 과자 먹을 때는 과자이름이 나온다.


"디자이너는 연봉이 얼마예요?"
진로 탐색 특강이 끝나고 어떤 학생이 물었다.
"2천에서 1억 사이."
그러자 학생은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대박."
나의 무성의한 대답이 대박인지, 디자이너 연봉의 널뛰기가 대박인지, 아니면 통일이 대박인지 알 수 없었다.


특강과 관려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부분이었는데, 뜬금없이 박근혜의 통일대박 발언을 툭 건드린다. 싸움꾼이다.


어묵


저자의 비판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사회에 대한 비판, 교육에 대한 비판, 문명에 대한 비판 다 나오는데, 우리 주변의 아저씨, 아주머니도 봐주지 않는다. 때로는 그 날카로운 평등함이 불편하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승객이 내리길 기다리지 않고 정면으로 밀어닥치는 등산복 아줌마를 만나면 팔꿈치로 정수리를 내리치고 싶다. 어른인지 어묵인지 그딴 인간을 존중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작품에서 보이는 작가는 대부분 실제 보다 미화된다. 작정하고 위인전을 써내려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내면의 감시자를 통해서 자기검열한다. 지하철에 앉으면 바로 눈부터 감는 사람들도 책에서만큼은 양보를 포교하며 지하철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현실에서, 내면의 감시자는 마치 바로 앞에 어르신이 서 있는 것처럼 눈을 감는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내면의 감시자가 눈을 감지 않는다. 어쩌면 내면의 감시자가 오히려 더 위악적인지 모르겠다.


이 사회에는 양보받을 자격이 없는, 나이를 벼슬로 아는 몰지각한 꼰대 할아버지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내 경우엔 2008년쯤 불현듯 깨달았다. 그때부터 노인에게 자리 양보하기를 그만뒀다.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이라는 따위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꼰대 할아버지와 커피 한잔하면서 "여자는 애 많이 낳는 순서대로 대우받아야 한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설교를 들으며 정신적 고문을 당해 볼 필요가 있다.


존경 따위는 절대 받지 않겠다는 존경 수급 거부 선언이라도 할 기세다. 만약 나중에 저자가 매우 유명해진다 하더라도, 정당에서는 공천을 주기 어려울 거다. 보좌관이 이 책을 읽기라도 했다면, 바로 공천 탈락이다.


묘사를 이렇게 찰지게 하고 적절한 비유를 하는 것은 디자이너기 때문일까. 저자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가르친다. 세밀한 관찰과 창의적인 비틀기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면 디자인도 하기 어려울 거다. 게다가 저자는 아주 삐딱한 안경으로 세상을 보고 있으니, 이렇게 독특하고 매력적인 책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 독자의 명치를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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