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강이슬 「안 느끼한 산문집」
영국에서 어학연수 중이던 그해, 나는 생일을 맞아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를 2주간 혼자서 여행했다. 히스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치고, 로마에서 미친놈에게 쫓기고, 베네치아에서 생일이 같은 남자를 만나고,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길을 잃어 산을 타다가 구조되고, 두브로브니크에서 낚싯대로 갈매기를 잡는 등 대략 200여 가지의 크고 작은 해프닝 끝에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자주 생각한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더 끔찍하고 부끄러운 방법으로 고백했으면 했지 고백을 안 할 위인이 못 된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
선생님과 진학 상담을 할 때 수필 작가가 되고 싶으므로 문예창작과에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가난하게 살고 싶으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가난은 두 음절만으로도 오싹한 것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 취직 잘될 것 같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답답하고 속이 상해서 담배를 한 대 태우는 동안 가난을 팔아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차고 넘치게 품은 이 가난을 싼값에라도 팔 수 있다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
그때부터 이 남자는 더 이상 소개팅 상대가 아니었다. 정복의 대상이었다. 청중이고, 관객이었으며, 나의 '백전백승 쾌활함'에 반하고야 말 잠재적 팬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술집에 입장해서 소주와 맥주를 한 병씩 주문했다. 남자는 나에게 술을 잘 마시느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못한다고 대답했다. 반전을 위한 거짓말이었다. 내 주량은 소주 세 병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소주병을 집어 들고 파워풀한 스냅으로 오리를 만들었다. 남자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속으로 '어때, 쩔지?'라고 으스대며 얼른 맥주병을 집어 수저로 병뚜껑을 따는, 일명 '뻥따'를 했다. 그 '뻥' 소리를 신호탄으로 삼아 나는 고삐를 풀었다.
"잔 수거, 잔 수거"
나는 한껏 흥이 나서 남자의 잔이 빌 때마다 내 앞으로 끌어와 대단한 비율로 소맥을 말아댔다. 술이 들어가니 입이 풀렸다. 한참 정신없이 말하다가 이 남자를 봤는데 표정이...... 표정이......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느낄 수밖에 없는 얼굴.
아무튼 그런 종류의 날이면 어두운 방에서 자책하며 굴을 파는 대신 세상 비장한 얼굴로 "나는 존나 짱이다!"를 되뇌자.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틀림없는 존나 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