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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May 12. 2020

가난을 팔아서 만든 재미

 _강이슬 「안 느끼한 산문집」

브런치


강이슬 작가의 글을 처음 브런치에서 발견했을 때가 기억난다. 재미있는 글은 보통 흥미진진한 사건을 바탕으로 썼거나, 작가가 아주 섬세하고 재미있게 그려서 만들어진다. 강이슬의 글은 둘 다다.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을 발랄하고 대책없는 문체로 그린다. 글 하나를 읽자마자 팬이 되어버려서, 모든 글을 다 읽고 댓글도 다 달았다. 이런 글이, 이 정도 수준의 글이 댓글이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사명감을 가지고 달았다.


영국에서 어학연수 중이던 그해, 나는 생일을 맞아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를 2주간 혼자서 여행했다. 히스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치고, 로마에서 미친놈에게 쫓기고, 베네치아에서 생일이 같은 남자를 만나고,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서 길을 잃어 산을 타다가 구조되고, 두브로브니크에서 낚싯대로 갈매기를 잡는 등 대략 200여 가지의 크고 작은 해프닝 끝에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 글들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다. 이미 다 읽은 글이었는데, 책으로 다시 읽었다. 다시 읽어도 너무 재미있다. 깔깔 거리며 읽었다. 나에게 책은 성취해야 할 대상이고, 흡수해야할 지식이라서 부담감과 목적의식을 가지고 읽는 편이다. 중간중간 얼마나 읽었는지 확인하기도 하고, 얼마나 더 읽어야 하나 체크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을 때는 아까워하며 읽었다. 벌써 절반을 읽었네, 마지막이 가까워지네, 안타까워 하며 읽었다. 이렇게 호기심이 부담감을 압도했던 책이 이전에도 하나 있었다.



삼국지


중국에서 말도 안 통하고 답답했던 시기, 방구석에 처박혀 삼국지만 읽었던 때가 있었다. 평소에는 엄두도 못 냈을 10권짜리 대하소설이었는데, 한글이 너무 반가워서 읽었다. 이문열의 삼국지였다. 황건적의 난부터 시작해서 동탁, 여포가 나오는 시기를 지나고, 주인공인 유비가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을 때 빠져들기 시작했다. 제갈공명이 본격적으로 나서는 시기부터는 아 벌써 6권이네, 아 벌써 8권이네, 아 벌써... 하며 손을 떨었다.


나에게는 강이슬이 이문열이고, 「안 느끼한 산문집」이 「삼국지」인 셈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삼국지」가 남을 속이는 것을 자랑으로 아는 사람들이 나오는 가면의 활극이라면, 「안 느끼한 산문집」는 남을 속이는 건 커녕, 좋아하는 마음조차 숨기지 못해서 습관처럼 고백을 하는 저자가 등장한다. 가면을 좀 빌려주고 싶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자주 생각한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시간을 되돌리더라도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더 끔찍하고 부끄러운 방법으로 고백했으면 했지 고백을 안 할 위인이 못 된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



가난


저자는 가난하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난함에 대해 뭐 이야기할 게 있겠느냐 싶겠지만, 88만원 세대 중에서도 작가는 더 가난하다. 선생님이 미리 이야기했듯이.


선생님과 진학 상담을 할 때 수필 작가가 되고 싶으므로 문예창작과에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가난하게 살고 싶으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가난은 두 음절만으로도 오싹한 것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아서 취직 잘될 것 같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저자는 가난을 팔아서라도 돈을 벌고 싶다고 했는데, 적어도 책은 팔리는 것 같다. 그의 가난이 이토록 빛나는 글을 만들어 냈다.


답답하고 속이 상해서 담배를 한 대 태우는 동안 가난을 팔아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차고 넘치게 품은 이 가난을 싼값에라도 팔 수 있다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



일기


저자의 개인적인 일기에 가깝다. 사랑 이야기, 여행 이야기, 친구 이야기, 가족 이야기, 방송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어떤 글을 읽어도 재미있다. 어릴 때부터 남들 웃기는 데 재능이 있었다는데, 그래서 글 하나를 써도 웃기는 것 같다.


그때부터 이 남자는 더 이상 소개팅 상대가 아니었다. 정복의 대상이었다. 청중이고, 관객이었으며, 나의 '백전백승 쾌활함'에 반하고야 말 잠재적 팬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술집에 입장해서 소주와 맥주를 한 병씩 주문했다. 남자는 나에게 술을 잘 마시느냐고 물었다. 나는 잘 못한다고 대답했다. 반전을 위한 거짓말이었다. 내 주량은 소주 세 병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소주병을 집어 들고 파워풀한 스냅으로 오리를 만들었다. 남자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속으로 '어때, 쩔지?'라고 으스대며 얼른 맥주병을 집어 수저로 병뚜껑을 따는, 일명 '뻥따'를 했다. 그 '뻥' 소리를 신호탄으로 삼아 나는 고삐를 풀었다.
"잔 수거, 잔 수거"
나는 한껏 흥이 나서 남자의 잔이 빌 때마다 내 앞으로 끌어와 대단한 비율로 소맥을 말아댔다. 술이 들어가니 입이 풀렸다. 한참 정신없이 말하다가 이 남자를 봤는데 표정이...... 표정이......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느낄 수밖에 없는 얼굴.



밑줄


문제는 있었다. 나는 에세이보다는 주제가 있는 인문학을 많이 읽었는데, 그래서 중요한 부분이나 멋있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이 책에는 멋있는 문장이 별로 없다.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수시로 위트 있는 표현이 툭툭 튀어나오지만, 붓으로 휘휘 그려 가훈으로 걸어놓을 만한 문장이 없다. 고민을 하다, 결정을 했다. 재미있는 문장에 밑줄을 긋자. 이건 재미있는 책이니, 도덕책에서 수학공식 찾지 않기로 했다. 특별히 위트 있는 문장에 밑줄을 그으니, 그을 데가 갑자기 많아졌다.


아무튼 그의 책은...


아무튼 그런 종류의 날이면 어두운 방에서 자책하며 굴을 파는 대신 세상 비장한 얼굴로 "나는 존나 짱이다!"를 되뇌자.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틀림없는 존나 짱이기 때문이다.


★★★★★ 아무튼 존나 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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