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맛집머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원댄싱머신 May 25. 2020

와플을 먹고 책을 덮었다

전날 먹은 술술술에 기절하듯 누워 있었다. 이러다가 일요일은 누워만 있겠다 싶어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낸 에고고 에휴 아흐 소리가 너무 할아버지 같아서, 나도 웃고 여자친구도 웃고 5분 넘게 웃기만 하다 힘이 다 빠져서 조금 더 누워 있었다. 그러다 겨우겨우 씻고 나왔다.


엔젤리너스가 있던 자리였다. 그때부터 뷰가 좋아서 자주 갔었는데 어느 날 문을 닫았다. 새로운 가게가 생긴다고 해서 걱정을 했다. 대기업이 나가고 새로 들어온 카페가 과연 잘 될까. 역시 연예인 걱정만큼 쓸데없는 사장 걱정이었다.



엔젤리너스 때만 해도 이 정도로 사람이 바글바글하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데시벨이 귀를 찌른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들어온다는 걸 제외하면, 코로나 사태는 이미 이겨낸 듯한 분위기다. 2층은 조용해서, 재빠르게 올라왔다. 2층은 형산강 뷰다. 말이 필요 없는, 탁 트인 광경이다.


드립커피와 와플을 내세운다. 드립커피는 괜찮다. 사실 잘 모른다. 커피는 그냥 쓴 맛으로 마시다 보니, 커피 자체로 와 맛있다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있기는 있었는데, 유명한 곳이 아니었다. 정말 커피가 좋아서였는지 기분탓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드립커피는 괜찮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와플은 정말 괜찮았다. 합정역 근처 와플 맛집보다 쫀득쫀득했다. 시청역 근처 와플 맛집보다 바삭바삭했다. 이대역 근처 와플 맛집보다 향기로웠다. 겉바속촉의 와플이라니, 와플 먹으러 포항 올 만하다.


아이스크림도 나오고 과일도 같이 나온다. 원래 아이스크림도 안 먹고 과일만 먹는 과일 집착남인데, 그리고 원래 과일도 안 먹고 아이스크림만 먹는 아이스크림 집착남인데, 와플이 제일 맛있었다. 과일 하고 같이 먹을 필요도 없고, 아이스크림 하고 같이 먹을 필요도 없다.


와플 그 자체로 충분하다.


오늘 먹은 메뉴는 딸기가 무더기로 나오는 메뉴였다. 딸기와 아이스크림으로 꽉 채워서 비쥬얼 만으로 배가 불렀는데, 다음부터는 기본 메뉴 먹어야 겠다. 딸기와 아이스크림이 같이 나오는 메뉴가 16000원 정도 하고 과일이 조금 적게 나오는 기본 와플 메뉴가 10000원 정도 하는데, 어차피 와플이 제일 맛있으니 저렴한 기본 메뉴로 간다.


커피만 마시러 몇 번 왔었는데, 와플은 이번에 처음 먹어봤다. 와플이 너무 맛있다고 여자친구에게 자랑했더니 원래 유명하단다. 나만 알고 있는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유명하다는 걸 깨닫게 되면 약간 허무하다. 나밖에 모르는 건 줄 알았는데.


허무함을 뒤로 하고 책을 폈다. 「준최선의 롱런」 이라는 책이다.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첫 줄을 읽고 바로 샀다.


나는 간헐적으로 행복하다.
 _문보영 「준최선의 롱런」


저자는 시인이다. 시인이 쓰는 시가 대단한 건 원래 당연하니까, 또 시인이 쓰는 시가 지루한 건 원래 당연하니까 별 감흥이 없었는데, 에세이는 달랐다. 시인이 쓰는 에세이는 이토록 거대한 거구나, 감탄하며 읽고 있다. 분명 하루 일기인데, 거기에 인생이 담겨 있고, 사회가 담겨 있고, 관계가 담겨 있다. 일상에 다 녹아있다.



준최선이라는 건,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게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답인 것 같았다. 나는 '하다가 그만둘 줄 알았는데 계속 하고 있네...'형 인간일 뿐이다. 어떤 작가는 자신은 매일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쓴다고 했다. 중요한 건 매일 정해진 분량의 글을 써내는 것인데, 그것보다 중요한 건, 정해진 분량을 넘기지 않는 것이랬다. 그게 그 작가의 비결인지도 모른다. 쓰고 싶어도 참는 것, 요컨대 최선을 다해 버리고 싶은 순간에 선을 긋는 것이다.
 _문보영 「준최선의 롱런」


스스로 최선을 다 한다고 말하지 않는 작가라니. 게다가 준최선으로 쓴 일기가 이 정도라니.


나는 책을 감탄하기 위해 읽는다. 감탄하며 읽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밑줄을 긋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말 읽는 보람이 있다. 밑줄을 칠만한 문장이 너무 많다. 어제 읽은 책 「인어의 탄식」에서는 밑줄 칠 부분이 정말 하나도 없나 하고 한 번 더 읽고 다시 한 번 더 읽고 나서도 결국 밑줄 칠 부분이 없어서 좌절하기도 했었다. 반면 이 책은 읽을 때마다 밑줄이 추가된다.


보물이다.


이 작가는 내가 찾은 보물이야. 손을 벌벌 떨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지인들도 쿠팡에 주문했다는 둥 밀리의서재에서 읽고있다는 둥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이 책을 읽어보니, 다른 책도 사고 싶다. 이 시인이 똥글을 쌀 리가 없다. 만원을 내면 일기를 써서 보내준다. 그걸로 먹고 사는 시인이다. 사는 것도 멋있다. 이 시인이 냄새나는 똥을 쌀 리가 없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름 책도 여러 권 내고, 아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잘 나가는 소소한 유명인사다. 나만 알고 있는 보물 시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남들도 알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으면 조금 허무하다. 허무함을 뒤로 하고 책을 덮었다.



와플 와구와구

매거진의 이전글 꽃집으로 쳐들어가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