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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Aug 03. 2020

우리집은 장례식장이 되었다

비만 오면 차단기가 내려간다.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가 싶다. 두꺼비집을 열어서 스위치를 올리면 1~2분 후 다시 내려간다. 올리면 다시 내려가고, 올리면 다시 내려가는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면서 분노의 크기를 차곡차곡 쌓는다. 끙끙 대며 산 위로 돌을 밀어올리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돌을 내려다본다. 시지프의 심정이 이럴까.


아차


냄새가 심상치 않다. 일주일간의 부산 출장을 마치고 들어오는 길인데,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냄새가 났다. 일단 불이 안켜지니 두꺼비집을 봤지만, 지금 두꺼비집이 문제가 아니다. 차단기에 버튼이 3개가 있는데, 하나둘 테스트를 해보니 가운데 버튼이 문제였다. 그래서 결국 가운데 버튼만 내리고 나머지 2개의 버튼만 올렸다. 가운데 버튼까지 올리면 전체 버튼이 다 내려가버린다.


가운데 버튼은 컴퓨터와 냉장고를 자동하는 버튼이고, 이게 사실 전부다. 그외에는 전기가 딱히 필요없다. 일주일만에 냉장고를 열어보려고 하는데, 두근두근.. 과연 상태는 어느정도일까. 비가 와서 차단기가 내려가고 냉장고가 꺼진거는 확실하다. 관건은 차단기가 오늘 내려갔느냐, 아니면 일주일 전에 내려갔느냐다. 요즘 장마라서 일주일 넘게 비가 쏟아지고 있다. 일주일 전에는 부산에 그리고 오늘은 대전에 물난리가 났다고 한다.


문을 열었다.


음.. 비위가 약한 분들을 위해, 냉동실 상태를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대신, 출장을 떠나기 전의 산뜻하고 든든했던 냉동실 상황을 설명하겠다.


일단 닭. 나는 위가 작다. 다른 사람들처럼 1인1닭, 이런건 엄두도 못낸다. 한 마리면 서너번에 나눠먹는다. 그래서 삼계탕을 끓여먹으면 절반 이상이 남는 게 정상이다. 남은 살을 잘게 발라서 지퍼백에 넣어놨다. 떡볶이에도 넣어 먹고, 카페에도 넣어먹고, 쌀국수나 라면에도 넣어먹을 수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생각만 해도 든든하다.


다음은 삼겹살. 누구는 고기 먹을 때 밥은 삼간다고 하던데, 나는 비율을 고려해서 먹는다. 삼겹살을 구우면 배추와 고추와 밥과 쌈장을 함께 먹기 때문에 혼자 먹으면 한 번에 한 줄 이상 먹기 어렵다. 그렇다고 마트에서 삼겹살을 한 줄만 사기는 민망하다. 세 줄 정도를 사서, 한 줄은 바로 구워먹고, 나머지는 지퍼백에 넣어놓는다. 나는 마늘과 쌈장을 함께 먹는 걸 좋아한다. 고기나 상추나 오이 어차피 쌈장과 마늘을 도울 뿐이니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암튼 삼겹살이 조금 있으면 쌈장과 마늘을 맛있게 먹을 수 있어서 든든한 느낌이다.



대패삼겹살도 있다. 이마트에서 냉동 대패삼겹살을 판매하는데, 1KG에 만원밖에 안한다. 라면을 끓일 때 한덩이씩 집어넣는데, 국물 맛이 달라진다. 소금을 넣어도 맛있다, 소금을 안 넣어도 맛있다,는 공평한 대답밖에 못하는 일관된 내 혀도, 대패삼겹살을 넣으면 확실히 달라진 걸 느낄 수 있다. 구워 먹는 목적이 아니라 국물 맛을 위해 조금 넣는 용도라서 꽤 오래 쓴다. 이거 하나 사면 몇달은 든든하다.



갑오징어도 있었다. 어느날 이마트에서 수박을 사고 슬렁슬렁 구경하며 산책하고 있었는데 (이마트가 산책하기에 좋다) 하얗고 이 갑오징어를 발견했다. 원래 오징어는 흙색이고 흐물흐물해서 귀엽기는 커녕 약간 징그러운 편이다. 하지만 갑오징어는 깔끔하고 산뜻한 흰색인데다 모양도 앙증맞아서, 인형 모으듯이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먹어요? 물어보니 살짝 대쳐 먹으면 된단다. 홀린듯이 계산을 하고 대쳐먹었는데.. 쫄깃쫄깃 완전 맛있다. 뭘 넣지도 않고 그냥 끊는 물에 대치니까, 사랑스럽고 귀여운 오징어가 되었다. 3마리를 사서 한 마리는 대쳐먹고, 한마리는 떡볶이 만들어 먹고, 나머지 한마리는 아직 냉동고 한켠을 차지하고 깜찍한 자태를 뽑내고 있었다. 생각하면 흐뭇하고 이쁘고 든든하다.



현미떡을 잊을 순 없다. 홍제동에 업무차 방문할 일이 있었다.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떡집에서 처음 보는 떡을 팔고 있었다. 분명 모양은 떡볶이 떡인데, 색깔이 연한 회색이었다. 물어보니 현미로 만든 거란다. 두팩 사서, 한팩은 냉동실에 바로 넣었다. 다른 한 팩은 그냥 먹기도 하고 나머지는 떡볶이를 해 먹었다. 쫄깃한 떡볶이 떡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고, 푹 퍼져서 부들부들한 떡볶이 떡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나는 후자다. 그래서 보통 떡볶이를 만들어 먹으면 오래 끓여서 떡을 흐물흐물하게 만든다. 그런데 현미떡은 그 자체로 부들부들하다. 이미 완전한 상태로 태어난 떡인 것이다. 태생이 남다른 현미떡도 냉동고 한자리를 견고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고추장이랑 설탕이랑 간장만 있으면, 언제든 보들보들한 식감으로 호호 불어먹을 수 있는 달달한 떡볶이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갑자기 여자친구가 쳐들어와도 걱정이 없을만큼 든든한 녀석이었다.



각종 야채도 적당히 있었다. 양파, 무, 당근, 마늘, 파, 버섯, 감자 등등. 미리 잘게 잘라서 언제든 국에 넣을 수 있도록 마련해놓았다. 된장찌개를 끓여도 던져 넣고, 김치찌개를 끓여도 조금 넣고, 카레에도 넣고, 국물이 있다면 어디에든 넣을 수 있는 만능 야채였다. 신라면 봉투를 뜯어도 여기서 끓이면 그냥 신라면이 아니었다. 대패삼겹살이 있고 각종 야채가 있기 때문에 훨씬 먹음직스러운 라면이 탄생했다.


빵. 잊을 뻔 했다. 나는 프렌치토스트에 자신이 있는 편이다. 계란과 두유를 거품기 이용해서 충분히 섞은 다음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을 빵에 적신다. 빵은 계란물에 젖어서 축처진 상태다. 그걸 후라이펜에 기름 두르고 굽는다. 아주 약한 불에 서서히 구우면 진짜 프렌치토스트가 된다. 가짜 아니고 진짜, 프렌치, 토스트. 계란과 두유는 항상 집에 있으니, 이 녀석만 있으면 프랑스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왠만한 항공권 보다 든든했다. 프렌치토스트를 만들기 위해서 제과점에서 일부러 약간 두껍게 썰어달라고 한 녀석이다.


이 친구들이... 이 모든 친구들이... 아...


적당한 비유를 생각해보겠다. 음... 그러니까 냉동고는 일종의 장례식장이 된 것이다. 나는 사망진단서를 발급하고 수시하고 안치하고 빈소를 선택하고 염습하고 입관, 그리고 발인에 이어 운구까지 착착 진행했다.


마음의 상처를 단단히 입어서 한동안 다른 친구는 못 사귈 것 같다.


이제 컴퓨터가 문제다. 토요일은 포항에서 일요일은 서울에서, 독서모임을 진행했는데 후기를 써야 한다. 7월 온라인 우쭈쭈 글쓰기 모임을 마무리해야 하고, 8월 온라인 우쭈쭈 필사 모임을 준비해야 한다. 일기도 써야 하고, 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닌데, 전기가 안들어오다니. 와이파이도 없을 뿐더라 노트북 전원도 얼마나 갈지 모른다. 여전히 차단기는 올리면 내려가고, 다시 올리면 내려가는 시지프 상태다.


겨우 전기가 없다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무력해지다니. 새삼 놀랍다. 핸드폰도 충전 못한다. 블루투스 키보드의 남은 전력, 핸드폰의 남은 전력이 내 남은 수명처럼 느껴진다.


여자친구가 있었다면 바로 전선을 어떻게 잇고 붙이고 뚝딱뚝딱 해결했을 텐데.. 맞다! 하고 바로 전화했다. 조금 울먹거리면서 사정을 설명했더니, 해답이 나온다. 전기가 들어오는 콘센트를 먼저 찾고, 멀티탭을 이용해서 전기를 끌어오라는 거였다. 두꺼비집에서 2개의 버튼은 이상없이 올라갔다. 하나는 전등이다. 그렇다면 다른 하나에 해당하는 콘센트가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 확인해 보니 컴퓨터 반대편 벽에 있는 한 콘센트에 전기가 흘렀다. 핸드폰 충전기를 꽂으니 충전이 되는 것이다. (핸드폰 충전기를 이용해 전기가 흐르는지 확인했다.) 지시대로, 3미터 멀티탭을 하나 사서 연결했다. 방의 좌우를 가로지르는 전선이 하나 생겼고, 컴퓨터는 켜졌다. 핸드폰도 키보드도 충전되기 시작했다. 방전될까 두려워 건들지도 못했던 블루투스 키보드를 켜서 일기를 썼다. (지금 이 글이다) 마음이 놓인다.


이제 냄새만 좀 사라지면 된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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