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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Aug 06. 2020

나는 문빠입니다

 _문보영 「준최선의 롱런」

올해도 좋은 책을 많이 읽었다. 그래서 뭐가 제일이다 하나 기는 쉽지 않다. 자기계발연대기, 거의모든거짓말, 피로사회, 나란한얼굴, 삼미슈퍼스타즈의마지막팬클럽, 소농의공부, 읽는삶만드는삶, 내문장이그렇게이상한가요 등등 좋은 책은 차고 넘친다. 다만 작가는 다르다. 올해 만난 최고의 작가를 묻는다면, 별 고민 없이 한 명 꼽을 수 있다.



처음 그를 만난건 팟캐스트였다. 일기 딜리버리를 한단다. 구독료를 받고 글을 보내서 먹고 사는 사람이 다 있다니, 이슬아처럼 진취적이구만, 감탄하고 지나갔다. 그렇게 이름만 알고 있었다. 어느날 중고서점 알라딘에서 서성이다 (알라딘이 서성이기 좋다.) 우연히 그의 책을 보게되었다. 아는 이름이라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첫문장을 읽고 바로 카드를 내밀었다. 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첫문장이다.


나는 간헐적으로 행복하다. 행복한 날에는 일기장에 사실만 적는다. 그날의 날씨, 거리, 먹은 음식, 음식의 맛, 색깔, 모양, 스쳐 지나간 행인의 모자, 모자에 붙은 먼지, 누군가의 표정, 그것의 색깔과 모양.


찬찬히 읽어보니, 책의 대부분이 첫 문장만큼 좋았다. 재치 있고 상상력이 뛰어난 작가가 이쁘게 언어화해서 만든 책이었다.


소중한 기억이 있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을 계속 끌고 가는 것일 텐데 이 소중한 기억은 휘발성이 남달라서 자꾸 사라지려 든다. 불행은 접착성이 강해서 가만히 두어도 삶에 딱 달라붙어 있는데, 소중한 기억은 금방 닳기 때문에 관리를 해줘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액자를 세워 두는 것으로 추억을 상기하려고 한다. 그런데 액자만큼 눈에 안 보이는 것도 없다. 그래서 추억은 가지고 돌아다니는 것이 좋다. 체감할 수 있도록 등에 메고 다니거나, 가방에서 책을 꺼낼 때 이따금 눈이 마주치도록 하거나, 손이 긁힐 수 있게 새로 출력해서 종이의 사면을 날카롭게 한다거나. 좋은 기억에 관한 트리거를 덫이나 지뢰처럼 심어 두는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문빠가 되었다. '문보영 빠돌이'의 줄임말이다. 일기 딜리버리도 신청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기껏 돈 주고 신청해서 계속 날아오는 이메일을... 클릭 한번 안 하고 있다. 읽지 않은 메일은 계속 쌓여간다.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좋다;;



작가가 브이로그도 한단다.


별거 없는데 계속 보게 되는 게 브이로그의 요상한 매력이라면 그게 브이로그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별거 없음을 우리 삶에 초대하고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브이로그를 보면서 자극이나 현란함, 특정 주제 혹은 재미를 기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한 인간이 하루를 얼마나 평평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 냈는지 구경한다. 별일 없는 나날들에 대해, 그 무의미에 반발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다.



★★★★★ 글로 먹고 살려면 이정도는 써야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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