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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Sep 09. 2020

동네입구역에서 오물오물

동네입구역


동네입구역에서 나와 올라오니 눈앞에 공원이 펼쳐졌다. 조금 놀랐다. 도시에, 그것도 지하철역 바로 앞에서 이런 광경이라니. 으리으리한 공원은 아니지만, 가게들 앞에 잔디밭이 있고 벤치가 중간중간 놓여있었다. 서울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다. 평소 같으면 바로 카페로 들어갔겠지만, 코로나 때문에 카페에 머무르기 힘들기도 하고, 벤치와 잔디가 이루는 정겨운 광경에 놀라, 그냥 벤치에 앉았다. 바로 앞에 태극당 본점이 있어서 국진이빵을 하나 샀다. 벤치에 앉은 김에 오물오물 빵을 먹으며 평소에 안 읽던 책을 꺼내어 읽었다.



벤치


서울에서 벤치는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도시를 기획하는 사람은 벤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 유현준 교수는 해외여행을 가면 벤치를 세어본다고 한다. 한국은, 경험상으로 느끼듯이 매우 적은 편이다. 미국 브로드웨이의 벤치는 (단위 면적 기준으로) 가로수길의 50배나 된다고 한다.

오히려 관심을 가지는 건 아파트에서다. 요즘 아파트에서는 벤치 없애기에 한창이다. 외부인이 들어와서 앉을 수 있으니 하나둘 없애는 것이다. 편하게 앉아서 국진이빵을 오물오물 먹으며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은 갈수록 줄어든다.


우리나라의 모든 거리는 움직여야만 한다. 앉으려면 어디든 들어가야 한다. 카페나 피시방,  찜질방, 노래방 같은 공간사업이 성업 중인 이유가 그거다. 문제는 누구는 4,000원이 넘는 스타벅스에 가고 누구는 1500원짜리 빽다방에 간다. 경제적 능력이나 세대에 따라 가는 공간이 달라진다. 그래서 추억을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멀어진다.
 _유현준


동네책방


동네책방도 벤치처럼 없어지고 있다. 구경은 서점에서 하고, 주문은 인터넷서점을 이용하는 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통계자료를 보면 동네서점은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휴폐업하는 수도 그 이상으로 늘어나고 있어서 문제지만, 헛된 희망 때문에 현실분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다. 참고로 나는 코로나 와중에 서점을 열었다. 사람은 없어서 국진이 빵이나 먹고 앉아 있다.


벤치


동네책방은 벤치 같은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와서 쉬고 둘러보고 뭘 먹기도 한다. 동네 커뮤니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망원역 근처에는 개똥이네책놀이터가 있다.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면 와서 놀고, 어른들은 아이 데리러 왔다가 같이 논다. 행사도 많이 하는데, 얼마전에는 부끄럽지만 전시회도 했었다. (끝났습니다ㅎ) 이때 전시회를 축하해준다고 아이들이 축하공연을 해줬다. 동네에 음악을 하시는 분이 있어서, 직접 동요를 만들었고, 동네 아이들 다섯명이 노래를 불렀다.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 그리고 전시보다 아이들 노래 들으러 온 어른들도 개똥이네책놀이터는 붐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동네책방에서 책을 사지 않는다. 첫번째 이유는 책을 안 읽기 때문이다. 이건 해결이 쉽지 않다. 노동 시간이 더 줄어야 한다. 핸드폰 개임도 조금 더 재미없게 만들어야 하고, 유튜브 영상도 조금 더 지루하게 만들어야 한다. 두번째 이유는 동네책방은 할인이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도서정가제로 15%라는 할인 제한이 생겼지만, 과거에는 훨씬 더 심했다. 인터넷 서점과 대형서점은 출판사에서 도매가로 책을 가져다가 절반가격으로 할인해서 팔아치웠다. 동네서점은 유통하는 책이 적으니 거의 판매가의 60~70 정도의 가격으로 책을 가져온다. 원가가 높으니 할인할 여력이 없다. 동네서점은 계속 망해가지만,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이후 감소세는 완화되고 있다.


도서정가제


도서정가제를 폐지하자는 주장도 있다. 첫번째 이유는 경쟁을 막는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할인할 자유를 막으면 안되는 것 아닌가. 경쟁에 대해 오해를 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트랙을 긋고 시작점과 도착점을 명확히 하지 않고서 공정한 달리기가 가능할까? 공정한 경쟁은 규제를 통해 만들어진다. 권투에도 체급이 나뉘듯이, 인터넷 서점과 동네서점은 체급이 다르다. 인터넷 서점이 자유롭게 가격을 정할 수 있다면, 덩치 큰 최홍만이 초등학생 권투 경기에 뛰어드는 셈이다. 최홍만이 아이를 마음껏 두들길 자유라고 한다면, 아이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두번째 이유는 책값이 너무 비싸서 서민경제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할인을 못 하니 책값이 가계에 부담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책을 안 읽는다. (단호) 당연히 책을 사지도 않는다. 평소에 책을 읽고 도서정가제의 취지를 이해한다면 이런 오해는 하지 않을 것이다.


도서정가제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등에서 단독 특별법으로 제정·시행중이다. 프랑스는 특히 책방 개업 시 각종 혜택과 ‘반아마존법’ 시행으로 오프라인 서점에서만 정가의 5% 이내 할인과 무료배송을 허용하는 등 문화산업으로 출판 서점계의 다양성을 보호한다.
 _한겨레 「전국 동네책방들 “도서정가제 개악 땐 동네서점 줄폐업” 성명」 2020-08-19 기사


동네입구역


오랜만에 앉은 벤치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정부에서 만든 벤치 덕분에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며 커피를 마시고 국진이빵도 먹으며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국진이빵만큼 달콤하고 벤치만큼 희귀한 동네서점도 정책과 정치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는 아름다운 동네의 모습이 있다면, 그 동네입구에 벤치와 동네책방이 있다면, 정치적으로 정책적으로 차근차근 진행하면 된다. 완전도서정가제가 그 첫걸음이다.


 *도서정가제 : 도서의 할인을 제한하는 법. 현재 10%의 할인과 5%의 적립까지 허용한다.

 *완전도서정가제 : 할인과 적립을 더 줄이자는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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