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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Sep 17. 2020

좌절과 어리둥절

 _김영하 「퀴즈쇼」

기억 속에서는 매우 재미있었는데, 나중에 다시 보니 유치했던 경험, 다들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있었다. 김영하의 「퀴즈쇼」다. 대학 시절에 읽었을 때는 놀라웠고 신기했다. 상황도 독특하고 마무리도 신비했다. 지금 다시 보니 유치하다는 느낌도 조금 든다.



주제는 퀴즈쇼다. 주인공은 퀴즈를 좋아하는 백수다. 어쩌다 퀴즈 서바이벌을 하며 돈을 버는 이상한 공간에 들어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조금 전의 사건을 통해서 적어도 한 가지는 배웠다고 생각했다. 어떤 질문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퀴즈도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인생의 거의 모든 질문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치하다는 표현을 썼지만, 그래도 좋기는 좋다. 소설가는 일상을 묘사하다가도 철학책을 한 권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묘사 하나하나를 허투루 볼 수 없다.



"나가자."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꺼냈다. "내가 낼게."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좀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결국 더 가난해진다. 가난을 숨기기 위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그 '남들 다 하는 것' 때문에 빚을 지고 그 빚을 갚느라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문학으로 빚어낸 88만원 세대를 본 기분이다. 청년들이 처한 상황과 무력함. 그 와중에서도 희망과 허무맹랑한 꿈을 쫓다가도, 당연히 맞이하게 되는 좌절과 어리둥절. 좌절은 어리둥절과 보통 함께 오는데, 좌절만 홀로 온다면 이미 성장소설은 아닐 거다. 김영하는 좌절을 문학적으로 정갈하게 다듬었고, 어리둥절은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빛나게 만들었다.



사랑이 어찌 노력과 재능으로 되랴? 그것은 정말 운명이거나 우연인 것이다. 정말 딜레마이다. 사랑의 기쁨은 그 예기치 않음에서 오는데, 정작 그 예기치 않음 때문에 인간은 불안에 떨며 그것이 제 손아귀를 빠져나갈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 처음 봤을 때는 별이 네개 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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