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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Sep 15. 2020

호방하게 내뱉는 분노

 _김현진 「그래도 언니는 간다」


대학 시절 좋아했던 책이다. 주로 경험에서 우러나온 깨달음이나 삶의 태도에 대해 적혀있다. 경험이라면 구체적으로 '가난'을 가리킨다. 어려서부터 글쓰기의 재능을 알았고 그건 가난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도 확실한 길이었다. 헉헉 대며 겨우 살아가는 비정규직이지만, 그 와중에 또 나눈다. 인세의 절반을 기부한다. 책도 많이 썼다. 이 책은 가벼운 에세이다. 가볍다고 해서 의미 없고 비논리적인 응원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일상 이야기, 영화 이야기, 세상 이야기 그냥 닥치는 대로 가볍게 이야기한다. 호방한 태도로 시원시원하게 내뱉는다.



나는 남자로부터 모욕당한 적 있고 돈 뜯긴 적 있고 이용당한 적 있고 얻어맞은 적 있지만 나는, 그래도 사랑보다, 남자보다, 내가 더 훨씬 소중했다. 그리하여 모욕을 더한 모욕으로 되갚았으며 이용을 증오로 되갚았고 주먹을 벽돌로 찍어 되갚았다.



내게는 술 사주고 밥 사주려는 언니가 딱 둘이 있는데, 남의 것 잘 얻어먹은 적 없다보니 미안하고 민망해서 자주 못 보겠다. 그중 한 언니가 강남에 있는 고급 딤섬집에 데려가준 적이 있는데, 만두를 지극히 싫어하는 나까지도 심지어 딤섬 밑에 붙어 있는 종이까지 염소처럼 먹어치울 정도였다. 그때, 돈을 많이는 아니고 좀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간절하게. 나도 삼십대에 여자애들에게, 딤섬까지는 못 사주더라도, 괜찮은 중국집 왕만두는 사줄 수 있는 언니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감상이 책 앞부분을 이룬다. 뒷부분은 훨씬 무겁다. 이명박 정권 1년을 촛불집회 1년으로 보낸 저자의 삶은 분노로 가득차 있었다. 집회나 농성장이라면 다 찾아가고 같이 화내고 같이 굶었다. 그렇게 뜨거운 내용이 가볍게 적혀있다.



지난 6월 말, 직사한 물대포를 정통으로 맞았더니 순식간에 몸이 몇 미터쯤 날아갔다. 화가 나서 목회자인 아버지에게 "대통령은 그렇다 쳐요. 여기도 장로라는데 어청수 경찰청장은 왜 저런 겁니까?"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작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게, 다 구약만 읽어서 그렇단다..." 나와 다른 민족은 모두 '이방'으로 간주해 모조리 치고 그들이 가졌던 것은 제 소유로 할 것, 많은 여자와 많은 재산과 많은 자식을 가지고 잘 먹고 잘 살라는 구약은 귀에 달다. 그러나 신약으로 넘어가면,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얻어맞은 뺨 대신 다른 쪽 뺨도 내놓으라고 외치며 평생 굶주리고 고단하게 살다가 끝내 사형으로 비참하고 짧은 삶을 마감한다. 그 제자들은 가족도 버리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다 하나 둘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예수는 옛 율법을 파하기 위해 세상에 왔으나 작금의 흉한 개신교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보다 구약의 족장이 되기를 원하는 모양이다.


까칠하면서 따뜻한 캐릭터다. 책을 읽은 후로는 이런 캐릭터를 보면, 바로 김현진 작가가 떠오른다. 좋아하는 만화 중에 「먹는 존재」라는 책이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을 봤을 때도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게 김현진이다.



저기 사람이 있다. 저기 여전히 슬퍼하는 자들이 있다. 함께 슬퍼하지 않으면 그 슬픔이 남 일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또한 인간 된 도리로 함께 슬퍼하자. 더 슬퍼하자. 더 슬퍼하자. 더 감정적이 되자. 스러져 간 올드타운의 아버지들을 잃은 슬픔, 여기 둔해지면 우리는 모두 뉴타운의 유령이 된다. 이성적인 것은 놈들의 몫으로 놔두고 나는 더 울고 더 소리치고 더 슬퍼하겠다. 이렇게 100일이다.


그래도 언젠가 이게 식을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싶다. 그런 헛된 꿈을 꾸고 싶다. 화가 덜 나는 세상이 올 거라고, 기어코 오고야 말 거라고 믿고 싶다. 돌려받지 못할 줄 알면서도 내어주고, 질 줄 알면서도 싸우고, 결코 보답 받지 못할 사랑을 하면서 그런 세상을 기다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지금 화를 내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화를 내는 것도 품이 드는 일이라 사람이 지친다. 그러나 무감각해지는 것이야말로 지금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라고, 그런 강한 믿음이 든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사실 별 생각 안 들고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얼버무리는 거다.)


★★★★★ 한때 우상처럼 바라봤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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