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예능을 보면, 연예인들이 나와서 다른 연예인 이야기하는 방식이 많다. 누구랑 술을 마셨는데 술버릇이 어떻더라. 내가 사실 형인데 나한테 형이라 안 하더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라디오스타가 대표적이다.
자꾸 귀에 거슬리는 건 선배님이라는 호칭이다.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르겠지만, 요즘 아이돌은 티비에 나오면 꼭 선배님을 붙인다. 보아 노래가 너무 좋더라구요. 동반신기 팬이에요.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보아 선배님 노래가 너무 좋으시더라구요. (가끔 이렇게 사물을 높이는 건 애교다.) 동반신기 선배님들 너무 팬이에요. (구체적으로 오방신기 팬인지 이방신기 팬인지 밝혀랏.)
누가 옆구리를 찌른 것도 아닌데, 아이돌이 이렇게까지 과하게 예의를 차리는 건 왜일까. 팬덤의 사랑만 먹고 산다는 아이돌에게 영양불균형이라도 온 것일까. 대나무 중에서도 항상 먹는 대나무 종류만 먹는다는 팬더는 의외로 영양불균형은 없다고 한다. 같은 대나무를 먹기는 하지만, 철마다 먹는 부위를 다르게 하기 때문이다.
예의는 두려움이다.
예의는 본질적으로 두려움의 표현이다. 나보다 강한 대상에 대한 경외감, 잘 알지 못한 상대에 대한 경계심이 합쳐져 예의라는 형태를 이룬다. 그래서 주로 예의의 대상은 조상, 어른, 선생, 타인이 된다. 잘 알고 있는 사람, 가까운 사람들과의 예의는 종종 생략한다.
절대 욕 먹지 않겠다는 다짐.
이 다짐이, 아이돌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선배님, 하고 말할 때, 티비 밖까지 전해진다. 왜 유독 아이돌만 그런지 생각해보면, 아이돌의 팬덤 문화가 강하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 매년 100개 이상의 신규 아이돌이 생겨나고, 이들은 곧장 다들 아이돌과의 경쟁에 돌입한다. 소비자의 눈에 들기 위해서 어떻게든 튀어야 하지만, 그 이상으로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로 자칫 미운털이라도 박히면, 겨우겨우 입덕시킨 고객들도 미련 없이 바로 탈덕할 수 있다.
얼마 전 (사실 얼마 전도 아니다. 이미 꽤 되었으니.) 김유정은 겨우 짝다리를 짚었다는 이유로 네티즌들의 욕받이가 되는 소동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연예인이 나에게 감정노동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으면 격분하는 것은 왜일까? "나는 네가 누리는 부와 인기를 가능하게 한 소비자 '대중'이니, 내가 받아야 할 몫을 챙기겠어"라는 불행의 평등주의가 폭력적으로 결합된 결과가 아닐까? 모두가 감정노동을 덜 강요받는 세상으로 함께 가자는 게 아니라, 나도 강요받으니 너도 강요받아야 한다는 소모적인 평등주의. 그리고 그런 요구는 대체로 때리기 만만한 젊은 여자 연예인에게 몰린다.
_이승한 「나는 지금 나의 춤을 추고 있잖아」
사람의 매력이, 자세히 보면 다 다르다고 하나, 직접 만나보는 것도 아니고, 티비 속에서 춤추는 모습만 보고 판단해보자면, 다들 비슷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고 모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닌가 싶다.
두려움에 기반한 예의에 억눌려 있다가, 어느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상황이 바뀌는 거다. 그때 이 아이돌은 작게는 오만방자해지고, 크게는 갑질을 하게 된다.
사실
사실 갑질이 걱정되는 건 아니고, 선배님이라는 단어가 거슬리는 이유가 있다. (아래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