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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Feb 27. 2021

죽음 앞에 선 사람들

_고다 마모라 「교도관 나오키」

나오키는 신참 교도관이다. 사형수를 관리한다. 그리고 그의 우상이었던 와타세가 교도소로 들어오게 된다. 사형수다. 과정은 이렇다. 과거 어느 날 와타세의 가족이 살해당한다. 범인은 금방 붙잡혔고, 교도소에서 10년을 복역한다. 와타세는 출소한 범인을 찾아가 단칼에 베어 죽였다. 가족에 대한 복수였다. 와타세는 일약 스타가 되었고, 나오키도 와타세를 동경했다. 힘든 상황에 있던 둘은 서로를 구원한다. 긴 시간 영혼의 교류를 나누고, 결국 나오키는 와타세의 사형을 집행한다.


줄거리만 보자면 비극적이다. 우정을 쌓고 손에 피를 묻힌다. 세부적인 내용을 보면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 사이가 좋았다가 다시 싸웠다가, 사형수 교도소에서도 사람 사는 느낌이 났다.



줄거리보다 참담한 건 그림이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그림을 본 적이 없다. 작가인 고다 마모라가 너무나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서 순식간에 초간단 콘티를 슥슥 짜고, 급한 마음에 맨발로 뛰어들어가 문하생을 불러 콘티를 건네며 심혈을 기울여서 잘 그리도록 신신당부했더니, 드래곤볼보다 귀엽고 슬램덩크보다 박진감 넘치고 원피스보다 입기 편한 대작 만화를 한 편 만들었는데, 편집자에게 원고를 보내는 과정에 그만 실수로 초간단 콘티를 보낸 게 분명하다.



고다 마모라의 그림에는 표정이 없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 오늘 죽게 되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하며 극한의 공포에 벌벌 떠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표정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상상에 의존하게 된다. 지금 나오키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까 분명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상황일 거야. 와타세는 동생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밝혀진 거니까 분노와 부끄러움이 교차하고 있을 거야. 이렇게 상상할 수밖에 없다. 자세하게 그리면 자세하게 그릴 수록, 상상의 영역은 줄어들 게 된다. 상상은 그리지 않은 부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좋게 해석하자면, 고다 마모라는 자유로운 상상과 공감을 독자에게 양보한 것이다. 이렇게 제멋대로 해석하다니. 고다 마모라가 제멋대로 그린 그림 탓에 상상력을 발휘해 버린 셈이다.



그림은 혹평을 했지만, 내용은 상당히 좋다. 교도관인 나오키는 사형수를 진심으로 대하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반성하는 사람을 죽이는 게 옳은 일일까? 아니야 악마와 같은 사람은 죽여야 해. 이 사람을 죽이면 복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잘못된 판단으로 진행한 사형은 되돌릴 수 있을까? 나름의 해답을 찾는 만화다. 그 과정을 독자에게 세세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이 만화는 교육 만화다.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교육 만화다. 독자에게 지금 수업중이라는 인식을 주지 않는다. 대놓고 교육하는 티를 내면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다. 거부감은 그림만을 향했다. 이상한 그림과 정교한 서사에 빠져 정신없이 읽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해서 읽었다.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같이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는 경험을 했다. 격한 감정이 종종 찾아왔지만, 공감을 방해하는 그림체 덕분에 필요이상으로 힘들지는 않았다. 검색해보니 이제 절판되어서 새책을 구입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한다. 훔쳐서라도 (아니면 중고로 구해서라도) 꼭 한번 읽어봐야 하는 만화다.

 


★★★★ 죽음 앞에 선 사람들, 그들이 사형수건 교도관이건, 죽음 앞에서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짓게 될 것이다. 그 표정을 상상해보았다.






덧.

예전에 SG워너비라는 가수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김진호를 비롯한 3명의 실력파 보컬이 부드러운 화음을 넣기도 하고 폭발적인 울림을 보이기도 하면서, 이른바 소몰이 창법이라는 유행을 낳았다. 갑자기 고다 마모리의 책을 읽다가 문득 SG워너비가 떠오른 이유는 가사 때문이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가사를 본 적이 없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내가 그대에게 부족한걸 알지만
세월을 걷다보면 지칠때도 있지만
그대에게 쉴곳이 되리라 사랑해요 고마운 내 사랑
평생 그대만을 위해 부를 이노래
사랑노래 함께 불러요 둘이서 라랄라
 _SG워너비 「라라라」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와 중독적인 멜로디 덕분에 노래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지만, 공감을 방해하는 가사 덕분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래는 좋은데 가사가 이상한 음악을 들으면, 나는 SG워너비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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