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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Mar 16. 2021

결국 우리 이야기

 _황정은 「연년세세」

나는 책을 여러 번 읽는 편인데, 처음에는 단순하게 읽고, 다음에는 포스트잇을 붙이며 읽는다. 조금 더 음미하고 싶다면 노란펜으로 밑줄을 그으며 또 읽는다. 그래야 머리에 좀 들어오고, 정리가 된다. 나는 섬세한 소설을 즐겨읽지는 않는다. 읽어도, 좋은지 안 좋은지 잘 모른다. 강한 메시지가 있는 걸 좋아한다. 두번 읽고 나서 책을 덮었더니, 포스트잇이 꽤나 많이 붙어있었다. 포스트잇 붙이기를 좋아하기 때문, 이라는 건 아니고 어쩌면 나도 이 책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가족에 대한 책임과 원망, 그리고 미안함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 이걸 작가는 단순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서 알려주고, 연극이나 과거 회상을 통해서 보여주고, 때로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추측하게 해준다.


말 없이 가족을 부양해왔던 주인공은 생각이 많으나 말을 하지 않는다.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한영진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순일에게 묻고 싶은 오랜 질문이. 왜 나를 당신의 밥상 앞에 붙들어두었는가. 한영진은 그러나 그걸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 질문을 들은 이순일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희생과 양보만 있었다면, 결과적으로 미움만 남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미안한 마음도, 안쓰러워하는 마음도, 잘 되기 바라는 마음도 뒤섞여 있다.


한영진은 최근에 그걸 생각할 때가 있었고 그러면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어린 동생에게 잘못을 했다고 느꼈다. 손써볼 수 없는 먼 과거에 그 동생을 두고 온 것 같았다. 이제 어른이 된 한세진에게 사과한다고 해도 그 시절 그 아이에겐 닿을 수가 없을 것 같았고.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



끝까지 주인공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다. 무엇을 말하지 않는 건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주인공의 입을 통해서 말하지 않고, 오히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가끔 여러 명이 이야기하는 공간에 짧은 정적이 흐르면 다들 놀라서 쳐다는 경우가 있다. 부재의 존재감이다. 없다는 것을 통해 보여주는 있음. 주인공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지만, 그걸 통해 우리는 알 수 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있구나.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그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엔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순자에게도 그것이 있으니까.


말하지 않으면 잊힌다. 잊혀도 좋다.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하고, 더 그럴듯한 기억으로 덮어버리기도 한다.


이순일은 그 자리에서 혼자였고 편안했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자주 뭔가를 잃어버렸다. 좋은 것이 생기면 나중에 잘 쓸고 거기 어딘가에 넣어두곤 했는데 둔 곳을 종종 잊었다. 내가 너무 잘 두는 바람에, 그럴 때마다 그렇게 말했고 그 좋은 것을 끝내 찾아내지 못해도 크게 상심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사라진 것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잊은 것일뿐, 거기 다 있을 테니까.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어쨌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 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하자면, 잊는 것일까. 내 아버지는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고 말했는데.


책의 제목은 「연년세세」다. 의도치 않게 태어나 고통받고 힘들어하고, 그리고 잊는다. 말하고 싶다가도 말하지 않고, 때로는 말해버린다. 말하지 않으면 점차 잊는다. 어머니의 삶을 딸이 그대로 (한영진) 걸어가기도 하고, 다른 길로 (한세진) 가기도 한다. 여러 해를 거듭하며 한 세대가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연년세세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책 한 권에 담겨있다.



★★★★ 여성들의 이야기에서 인류를 본다. 그 인류는 결국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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