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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원댄싱머신 Mar 15. 2021

그 자체로 거대한 시

_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책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 책을 읽게 된 계기가 있는 것처럼, 원래 소설을 읽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소설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있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었으나 인문학 위주로 읽었다. 궁금한 걸 확인하는 목적으로, 막연한 직관에 합리적인 이론을 뒷받침하는 목적으로 책을 읽었다. 사회에 대한 관심과 결부되어서 자연스럽게 사회학책을 많이 읽었다. 노동 , 환경, 젠더 문제부터, 경제, 정치 문제까지 나는, 연애 빼고는 다 책에서 배웠다. 생각해보니 연애도 책에서 도움을 받은 것 같다. 소설은 그래서, 의미 없는 책이었다. 이론을 정립해주는 것도 아니고, 지식을 체계화시키는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재미만을 위해 보는 것이니 게임이나 영화와 비슷한 오락거리로 여겼다. 시간 때우기 아닌가?


시간을 때운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항상 바쁘게, 정확히 말하자면 쫓기듯 살았다. 그래서 게임을 전혀 하지 않듯이, 영화도 거의 보지 않았다. 소설을 읽지 않은 것도 어찌 보면 나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소설을 통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 계속 인문학만 읽었을 것이다. 인문학은 그나마 잘난 척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난 척조차 할 수 없는 소설을 사랑하기까지 나는 세 권의 책을 거쳤다. 정치책이 정치만을 이야기한다면, 단순히 이야기만 한다면, 어느 소설은 삶의 방향을 보여줬다. 내가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줬다. 「마왕」을 읽고 나는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철학책이 철학만을 이야기한다면, 단순히 이야기만 한다면, 어느 소설은 삶의 무게를 내 손 위에 올려 직접 느끼게 해줬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구나, 삶은 이런 거구나, 하고 안심할 수 있었다. 여타 인문학이 내용만을 늘어놓는다면, 여타 시가 형식만을 자랑한다면, 어느 소설은 내용이 형식이고 형식이 곧 내용이었다. 아름다운 형태에 정신을 놓고 감상하다보면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시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소설이자, 그 자체로 커다란 시였다. 그리고 확실히 한국문학은 아름다운 것이구나, 나는 한국 사람이기에 한국소설을 아름다운 시로 받아들이고 감상할 수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가지게 해주었다.



생각해보니 매일 책을 읽고 습관처럼 독후감을 쓰지만, 가장 좋았다는 책에 대한 독후감은 적지 않은 것 같다. 「마왕」은 전에 적은 독후감이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여러 번 읽었는데, 나중에 다시 한번 읽고 독후감을 써야겠다. 오늘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이 책을 어떻게 골랐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행운이었다. 요즘에는 게을러져서 카톡 뉴스만 보지만, 훨씬 부지런하고 열정적이었을 때는 시사주간지를 읽었다. 시사IN과 한겨레21을 읽으며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만 생각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도 두려워하지 않던 시기였다.


싱싱한 계란처럼 탈모가 진행되던 시기, 한겨레21의 문화란에서 소개(이자 사실상 광고)를 처음 발견했다. 못생긴 이성과의 사랑이라. 주제가 재미있군, 하고 흘려버렸다.


이 소설은 단순하면서도 까다로운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 질문이다. 소설 주인공인 ‘나’는 열아홉 푸른 나이에 백화점 지하주차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같은 백화점에 근무하는 못생긴 ‘그녀’와 마주친다. 그리고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에게도 남자를 얼어붙게 만드는 힘이 있”(82~3쪽)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동갑내기인 ‘그녀’에게 급속히 빠져든다. 그런 ‘나’인즉 백화점의 여직원들끼리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미스터 알바’로 뽑힐 정도로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다.
 _한겨레21 「세기의 추녀와 사랑에 빠진 미남」 2009-07-23 기사


가난한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거의 도서관에서 살았고 책도 거의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서점은 나들이였고, 책구매는 사치였지만, 우연히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오래전 흘려봤던 소개 문구가 생각났다. 재미있어 보이는데? 하고 집어들었으나, 여전히 살맛이 나지 않는 제목인데다 매우 두꺼웠다. 400페이지가 넘었다. 일단 조금만 읽어봐야지 하고 앞부분을 읽었으나 지루했다. 이상한 제목에 두껍고 앞부분이 지루하기까지 한데, 어떻게 사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작은 움직임에서 커다란 변화는 시작되고, 작은 움직임은 원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상한 제목과 두꺼운 책을 넘어서고 지루한 앞부분이라는 세 단계의 진입장벽을 넘어서야 나는 이 책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진입장벽이 있어야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거야, 라며 작가가 앞부분은 의도적으로 지루하게 만든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나는 이 책을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앞에서 간단히 말한 것처럼, 이 책을 나는 거대한 시로 받아들였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표현하지? 감탄을 하며 한 장을 넘기고, 그 감탄이 끝나기 전에 새로운 감탄을 만나서 딸꾹질을 했다. 딸꾹질이 다음 딸꾹질로 넘어갈 때 어느새 두꺼운 책은 끝난다.


아무것도 인용하지 않고 이 독후감을 끝내기에는 심심해서 간단히 소개한다. 하지만 평가는 유보하기 바란다. 이 책의 괴상한 제목이 그리고 지루한 앞부분이 이 소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처럼, 부분부분으로는 이 감동을 전달할 수 업다. 소설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적어도 몇 장은 읽어야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이상한 일이었다. 특별한 대화도 없이 그저 웃기만 했는데, 가게를 나올 무렵 우리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가게를 나와서 안 일이지만, 우리가 걸어온 방향의 반대편 ㅡ 즉 입간판의 또 다른 면엔 역시나 아크릴로 크게 <호프>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적힌 작은 영문의 <HOPE>를 우리는 볼 수 있었다. 난데없는 희망이 그토록 우리의 가까이에 있던 시절이었다.
 _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퇴근을 하고, 얘기는 켄터키 치킨에서도 이어졌다. 이 포크를 봐. 앞에 세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봐,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과연 어떤 창이 맨 먼저 대상을 파고 들었는지... 호의냐 물으면 그것만은 아닌 거 같고, 동정이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란 거지. 뭐, 맞는 말이긴 해. 손잡이를 쥔 손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상대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어. 처음엔 어떤 창이 자신을 파고든 건지 모호해. 고통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것 역시 통째로 전달되기 마련이지.
 _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포스트잇을 붙였다


★★★★★★ 별다섯개로는 부족하다. 소설의 아름다움이 극단으로 향하면 시가 된다.





마찬가지로 별다섯개로는 부족한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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