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이 소설은 단순하면서도 까다로운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 질문이다. 소설 주인공인 ‘나’는 열아홉 푸른 나이에 백화점 지하주차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같은 백화점에 근무하는 못생긴 ‘그녀’와 마주친다. 그리고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에게도 남자를 얼어붙게 만드는 힘이 있”(82~3쪽)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동갑내기인 ‘그녀’에게 급속히 빠져든다. 그런 ‘나’인즉 백화점의 여직원들끼리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미스터 알바’로 뽑힐 정도로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다.
_한겨레21 「세기의 추녀와 사랑에 빠진 미남」 2009-07-23 기사
이상한 일이었다. 특별한 대화도 없이 그저 웃기만 했는데, 가게를 나올 무렵 우리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가게를 나와서 안 일이지만, 우리가 걸어온 방향의 반대편 ㅡ 즉 입간판의 또 다른 면엔 역시나 아크릴로 크게 <호프>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적힌 작은 영문의 <HOPE>를 우리는 볼 수 있었다. 난데없는 희망이 그토록 우리의 가까이에 있던 시절이었다.
_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퇴근을 하고, 얘기는 켄터키 치킨에서도 이어졌다. 이 포크를 봐. 앞에 세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봐,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과연 어떤 창이 맨 먼저 대상을 파고 들었는지... 호의냐 물으면 그것만은 아닌 거 같고, 동정이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란 거지. 뭐, 맞는 말이긴 해. 손잡이를 쥔 손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상대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어. 처음엔 어떤 창이 자신을 파고든 건지 모호해. 고통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것 역시 통째로 전달되기 마련이지.
_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